"전국~ 노래자랑!"
매주 일요일 낮 12시가 되면 어김없이 공중파 TV 속에서 흘러나온 구수한 목소리. 프로그램의 백미인 '땡'과 '딩동댕' 사이에선 많은 이들이 울고 웃었다. 특히 해당 프로그램 진행자인 고 송해의 넉넉한 입담 덕분은 참가자와 시청자는 모두에게 웃음꽃을 선물하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국민 모두의 일요일을 책임졌던 송해가 10일 진한 아쉬움 속에 영면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70년 가까운 세월을 국민과 함께 보냈던 원조 '국민 MC' 송해의 인생 여정을 사진으로 따라가봤다.
고인은 1927년 북녘에서 태어났다. 황해도 재령군에서 태어난 그는 1948년 해주예술전문학교(현 평양국립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했고, 23세였던 그는 1951년 연평도에서 가까스로 유엔군 군함에 몸을 싣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더불어 망망대해를 헤매면서 그는 자신의 이름도 새로 지었다. 송복희에서 '바다 해(海)'자를 쓴 ‘송해’로. 그는 에세이 '송해 1927'에서 "그것이 가족들과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고인은 과거 해주예술전문학교에서 공부했던 성악에 착안, 29세인 1955년 유랑극단인 '창공악극단'에 입단해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대중 앞에 나선 계기는 노래였지만,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악극단 사회를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진행자 경험도 축적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TV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대중문화 플랫폼이 극장에서 방송으로 옮겨갔다. 고인 역시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악극단에서 쌓은 경험으로 그는 1975년부터 17년간 현재는 사라진 'TBC 동양방송'의 라디오 디제이(DJ)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를 맡아, 진행자로서의 내공 다지기에 착수했다.
그렇게 순탄한 진행자의 길로 들어섰던 그에게 청천벽력의 소식이 전해진 건 1986년. 당시 20세였던 아들을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로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훗날 "가수가 되겠다"던 아들을 반대했다고 전한 고인은 "자식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다"며 "자격을 잃은 아버지로서 후회가 크다"고 회고했다. 자식의 사고로 실의에 빠져 있던 그 무렵, 안인기 KBS 프로듀서(PD)가 손을 내밀었고 이후 '경북 성주' 편을 시작으로 전국노래자랑의 마스코트로 돌아왔다. 안 PD는 중견 영화배우로 유명한 안성기의 친형이다. 그렇게 전국노래자랑에 합류한 고인은 1991년 건강 문제로 6개월, 1994년 개편 문제로 6개월을 각각 쉬었던 기간 이외엔 매주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어 왔다.
23세였던 1951년 당시 남쪽 땅으로 건너온 고인이 고향인 황해도를 다시 찾기까지엔 52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2003년 8월 15일, 광복절 특집으로 평양 모란봉 공원 야외무대에서 진행된 '평양노래자랑'의 사회를 맡으면서다. 하지만 고인은 안타깝게도 삼엄했던 분위기 탓에 헤어졌던 모친이나 여동생을 만나진 못했다. 고인은 생전, 고향 땅인 황해도 재령 무대에 서고 싶다고 수차례 밝혔지만 끝내 무산됐다. 고인은 2010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황해도 재령편 '전국노래자랑'을 열고 싶다"며 "그것은 내가 말할 수 있을 때까지의 평생 소원이다"라고 전한 바 있다.
고인이 진행했던 프로그램은 1971년부터 방영되면서 대중들과 만났다. 이후 1988년부터 34년 동안은 매주 일요일 정오에 고인의 목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고인은 특히 녹화 전날엔 촬영지에 먼저 방문, 지역 주민들과 어울리면서 사전 취재에 들어간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로그램 진행 도중, 해당 지역의 맛집이나 특산품, 축제 등을 자세하게 소개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고인은 평소 그의 프로그램을 "내가 평생 배워야 할 교과서"라며 "누가 잘하고 못하는 것보다 그저 우리 생활이 묻어나는 곳"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이런 노력은 지난 4월, 기네스북에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로 등재되면서 빛을 냈다.
하지만, 야속한 세월은 그에게 더 이상의 시간을 허락하진 않았다. 지난 8일 유족 등에 따르면 고인은 서울 강남구 도곡동 자택에서 눈을 감았고 10일 오전 4시 30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숙연한 분위기 속에 영결식이 엄수됐다. 이 자리엔 유족과 지인, 80여 명의 연예계 후배 등이 함께했다. 고인의 별세 소식은 해외 언론에서도 주목했다. 워싱턴포스트는 "'국민 MC'라는 별명을 가진 고인은 한국에서 널리 인정받고 사랑받는 인물이었다"며 "전쟁의 혼란 속에서 가족과 헤어져야 했던 실향민으로서 한반도의 분단 사실을 강조해오기도 했다"고 전했다. 고인의 삶을 담은 평전 '나는 딴따라다'(2015년) 저자인 오민석 단국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애환을 몸소 겪으셨고 한국전쟁이라는 어려운 시절을 온 국민과 함께 헤쳐오신 분"이라며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최근 한류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의 한복판에 계셨던, 한국 근현대 대중문화사의 박물관이다"고 고인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