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프리즘] 간병에 대하여: 영화 ‘욕창’을 보고

입력
2022.04.11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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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흥권 분당서울대병원 대장암센터 교수

“노인을 돌보는 일은 낭만적 사랑이나 아이를 낳는 일 같은 다른 종류의 헌신에 비해 조언이나 독려가 될 만한 분량의 글이 없다. 그 일은 마치 예전에 없던 어떤 일처럼 슬그머니 마치 한 번도 경고를 받지 못했고 지도에도 없던 암반으로 가득한 해변처럼 갑자기 당신 앞에 닥친다.”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노인 창식은 퇴직 공무원이다. 아내 길순은 뇌출혈로 운동ㆍ언어 장애가 생겨 입주 간병인이 돌보고 있다. 간병인 수옥은 현재 불법 체류 상태로 ‘떳떳하지 못함’과 타협한 저렴한 임금을 받고 있다.

평온한 일상이 유지되던 어느 날, 수옥은 길순 엉덩이에서 욕창을 발견한다. 놀란 창식은 눈살을 찌푸리고, 욕창을 같이 살피기보다 물러서서 휴대폰을 꺼내 막내딸 지수에게 전화한다. 그는 아내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 하는 의무가 면제돼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욕창은 몸 특정 부위에 압박이 계속 가해지면서 혈액순환이 안 돼 조직이 죽어 생기는 궤양이다. 뼈 돌출부에 흔히 생기고 공통적인 원인이 압박인 탓에 의학적으로 ‘압박 궤양’이라고 부른다. 욕창은 길순처럼 뇌신경이나 척수신경이 손상된 환자 특히 노인 환자에게 잘 생긴다.

모든 병이 그렇지만 특히 욕창은 한 번 발생해 심해지면 관리하기 어려워 고위험 환자의 경우 압박 부위를 잘 관찰해 조기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길순의 욕창은 이 가족의 축적된 모순과 부조리가 응축돼 드러난 병이다. 내부의 고정된 힘과 외부 압박이라는 충돌. 막내딸 지수는 간병인을 구하고, 길순이 외출할 때 돌보는 유일한 사람이다. 입원한 환자 곁에 오래 있는 보호자는 거의 대부분 딸이다.

“그거 뭐 이제 재미없어요. 만날 똑같은 타령인데요.” K드라마가 어느 새 지겨워진 수옥의 말이다. 하지만 노년에는 어제와 똑같음을 유지하는 것이 오늘의 목표이자 기쁨이다.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나고, 했던 말을 다시 할 수 있는 것보다 즐거운 일은 없다.

작년의 운동량, 어제의 걸음 수를 지키려고 만보기에 집착한다. 약해지는 육체 기능이 더 나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최상의 성취다. 그런 창식의 눈에는 뇌졸중에 걸린 후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로 동네에 돌아다니는 독거 할아버지를 마주치는 것이 불편하다. 자신에게도 언젠가는 닥칠 일이다. 아픈 자신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주변을 간병할 것인가?

붙박이 간병에는 당연히 극심한 피로와 탈진이 수반된다. 환자를 돌보는 짧은 시간 또는 여유 시간을 활용해 여러 전문가의 도움 아래 보호자 심리·정서 회복 프로그램이 진행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영국의 경우 가족이나 돌봄 제공자가 피로를 회복하고 재충전 기회를 갖도록 하기 위해 ‘돌봄자 휴가(Respite)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영화에서 보듯 자식들은 돌봄에 참여했지만 고통에 지나치게 노출돼 가족 간 불화로 나타났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이 아프리카 속담은 한 아이가 온전하게 성장하도록 돌보고 가르치는 일은 한 가정만의 책임이 아니며, 이웃을 비롯한 지역사회도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 말이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 사회에는 이런 말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 노인을 돌보는 데에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권대익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