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미국 원폭 투하 4년 뒤인 1949년 8월, 카자흐스탄 세미팔라틴스크 상공에 거대 버섯구름이 솟았다. 구소련의 22킬로톤급 첫 원폭(RDS-1) 실험이 성공한 거였다. 최소 10년은 핵독점국 지위를 누리리라 여겼던 트루먼 정부는, 무려 24억 달러나 들여 서방 최고의 과학자들이 극비리에 이룬 성과를 소련이 불과 4년 만에 따라잡은 사실에 경악했다.
미국은 한 달 뒤인 9월 독일 출신 영국 국적 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Klaus Fuchs, 1911~1988)를 유력 용의자로 연행, 영국 첩보부 등과 협력해 집중 심문한 끝에 이듬해 1월 자백을 받아냈다. 미국 정부의 무력한 항의에 소련 정부는 1950년 3월 7일 푹스를 스파이로 활용한 사실이 없다는 짤막한 공식 입장을 조롱하듯 발표했다. 냉전 핵군비 경쟁이 그렇게 본격화했다.
독일 서부 뤼셀스하임에서 독일 공산당원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푹스는 라이프치히대 재학 시절 독일 공산당에 입당했고, 나치 집권 후 영국으로 이주해 브리스톨대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42년 영국 핵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영국 국적을 취득했고, 1944년 맨해튼프로젝트에 투입돼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원 이론물리학부에서 우라늄 농축 기술로 핵폭탄 제조에 간여했다. 당시에도 투철한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서방 국가들이 반나치 동맹국 소련 몰래 핵폭탄을 개발하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껴 1943년부터 소비에트 군사정보부와 협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소련이 명목상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탓에 '간첩' 혐의 대신 기밀준수 서약 위반 혐의로 14년형을 선고받았고, 1959년 모범수로 석방되자마자 동독으로 추방됐다. 동독서 그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의 평전 'Atomic Spy(2020)'를 펴낸 낸시 손다이크 그린스팬은 "그의 의도는 양대 강국의 전력 균형을 맞춰 핵 억지력을 도모하려던 것"이었다고 썼지만, 사후 합리화일 뿐이란 게 다수의 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