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안 다니고 쓸데없는 얘기나 해도 되는 행복

입력
2022.02.23 22:00
27면

어렸을 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들은 뭐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대학 졸업 무렵엔 회사원이 되고 싶었다. 사업을 하거나 예술가로 살 자신은 없었고 회사를 다니며 스스로 돈을 버는 게 제일 떳떳한 삶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회사에 들어갔다. 하필 광고대행사였다. 사람들이 '너는 카피라이터 같은 거 하면 잘할 것 같아'라고 반복해서 말해주었고 나도 '카피는 짧은 글을 쓰는 거니까 설렁설렁해도 월급을 받을 수 있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대단한 착각이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집중력을 발휘해 매력적인 메시지를 만드는 건 즐거운 일이었지만, 수많은 아이디어 중 하나만 채택되고 나머지는 모든 '틀린 것'으로 간주되는 업계의 생리가 싫었다. 세상의 모든 성공작이 옳은 게 아니듯 실패작이라고 해서 모두 그른 건 아니지만 광고에서는 그랬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다 그랬다.

신자본주의의 첨병답게 광고는 모든 게 경쟁이었다. 심지어 '사내 팀 경쟁'도 흔한 일이었다. 파티션 너머 옆팀과 경쟁 관계가 되어 서로의 아이디어 노트를 숨기고 각자 밤을 새워 시안을 만드는 건 "친구들끼리는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라고 가르쳤던 어릴 적 선생님의 말씀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힘든 게 '효율 제일주의'였다. TV 광고는 15초 안에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해야 하기 때문에 에둘러 가거나 망설일 틈이 없었다.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메시지나 태도는 '쓸데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하루는 녹음실에서 오디오 실장님에게 "실장님, 이 카피는 좀 들릴 듯 말 듯 녹음하면 안 될까요?"라고 물었더니 화들짝 놀라며 "아니, 카피를 힘들게 써 놓고 왜 안 들리게 녹음을 하세요? 말도 안 돼요!"라고 외쳤다. 물론 녹음은 아주 똑똑한 발음으로 잘 진행되었다. 케이블 TV를 시청하다가 프로그램 끝나고 나오는 건강보조식품 광고의 우렁찬 오디오 볼륨에 놀란 경험이 있을 것이다. 혹시나 안 들리면 큰일 나기 때문에 광고는 늘 최고 볼륨 상태로 납품된다.

녹음실 사건 이후로도 계속 회사를 다니던 나는 결국 재작년에야 광고를 그만둘 수 있었다. 퇴직 후 내가 택한 건 글쓰기였다. '둘 다 회사 안 다닌다고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쓴 첫 책 제목은 '부부가 둘 다 놀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생각보다 잘 팔렸다. 소비자는 편리함과 효율을 추구하지만 독자는 소비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글쓰기가 좋았던 건 인생에 대한 것이라면 '쓸데없는' 얘기를 해도 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너그러웠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했듯 이 동네는 글 쓰는 사람 하나 더 생겼다고 "경쟁자가 나타났다!" 소리치는 곳은 아니었다.

글쓰기를 하고 책을 내면서 글쓰기 강의도 하러 다니게 되었다.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온라인 강의를 더 많이 하지만 어쨌든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즐거운 일이다. 내가 쓴 자기소개서 형식을 빌려 취업에 성공한 카피라이터의 인사를 받았을 땐 정말 기뻤고 지난주엔 내 책을 읽고 글 쓸 용기를 냈다는 브런치 작가의 이메일도 받았다. 너 같은 게 어떻게 취직을 해서 먹고사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차던 대학 동창들아, 나 이제 회사는 안 다니고 쓸데없는 얘기나 하며 논다. 뭐 먹고 사냐고? 어떡하든 다 살아. 괜찮아.


편성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