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경쟁당국의 반대로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의 합병이 무산되자, 지난 2년 반 동안 늑장 심사를 하느라 합병 결론을 내리지 못한 공정거래위원회의 책임론이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공정위는 빠른 심사에 따른 실익이 없는 데다, 세계 1위와 4위 조선사 간의 합병인 만큼 충분한 심사 시간이 필요했다고 항변하고 있다.
16일 공정위에 따르면 공정거래법상 기업결합 심사는 신고 후 30일 이내가 원칙이고 연장 기간을 포함해 최대 120일까지다. 하지만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 간 합병 심사는 약 2년 반 동안 진행됐다. 이 기간 기업결합 신고 대상 국가인 △중국 △싱가포르 △카자흐스탄이 ‘조건 없는 승인’ 결정을 내린 것과도 대조적이다.
당초 정부는 두 회사 합병에 낙관적이었다. 해외 경쟁당국의 심사 결과도 자신하는 분위기였다. 2019년 3월 김상조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은 “다른 국가 경쟁당국이 참고할 합리적 결론을 내리겠다”며 “누구보다 한국이 빨리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상 심사 승인을 시사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조성욱 공정위원장이 새로 취임하고, EU 경쟁당국이 합병에 부정적 시각을 드러내자,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조성욱 위원장은 지난해 5월 “법과 원칙에 따라 경쟁 제한성이 있는지, 이 부분이 해소될 수 있을지 보겠다”는 원론적인 답변에 내놓은 데 이어, 10월에는 “연내 마무리되도록 노력하겠다”고만 밝혔다.
공정위 심사가 늦어지자 이에 대한 불만도 쏟아졌다. 두 회사와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등의 구조조정을 주도한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은 공정위를 겨냥해 “대우조선도 아시아나항공도 국내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너무 힘들다”며 “정부가 전향적으로 검토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우리나라 경쟁당국도 쉽게 찬성을 못했는데, EU가 승인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며 "EU가 반대하더라도, 공정위가 먼저 결론을 내고 승인쪽으로 분위기를 이끌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정위는 우리나라 기업 간 결합이라고, 원칙 없이 유리하게 결론을 내릴 경우 공정위 공신력에 문제가 생길뿐 아니라, 오히려 해외 경쟁 당국의 반발을 사 좋지 못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고 항변하고 있다. 공정위가 찬성을 하더라도, 해외 경쟁 당국의 승인을 못 받으면 어차피 승인은 물 건너 가는 것이라, 빠른 심사에 따른 실익이 없다는 주장도 펼치고 있다.
EU 반대로 해외 대규모 기업 간 결합이 무산된 사례도 공정위 행보를 위축시켰다. 지난해 4월 캐나다 1위 항공사 에어캐나다는 3위인 에어트랜짓과의 합병을 시도했지만 EU가 무리한 시정조치를 요구하자 결국 자진 포기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세계 경쟁당국이 모두 지켜보고 있는데, 한국에만 유리하게 기업결합 승인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다른 경쟁당국과의 상의가 중요해서 EU 측과도 수시로 논의해 온 공정위에 무산 책임론을 떠넘기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