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의 제12차 각료회의가 석 달 앞으로 다가왔다. 4년 만에 열리는 탓에 풀어야 할 숙제가 많지만 하나같이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들이어서 회의 전망이 밝지 않다. 지난 3월 취임한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이 성과도출을 위해 회원국들의 정치적 결단을 독려하고 있으나 반응은 거의 없다. 지금같이 세계 경제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어느 회원국이 나서서 희생을 감수하고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사실 현재 WTO가 직면한 문제의 대부분은 선진국과 개도국 간 뿌리 깊은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 상품과 서비스 협상은 상업적 이익의 균형이라는 WTO 협상의 본질을 떠나 개도국의 개발을 위해 선진국이 어느 정도 기여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로 성격이 바뀌었다. 개도국은 지금까지의 무역협상이 개도국보다는 선진국에 더 큰 이익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실제 선진국이 시장을 개방해도 개도국 상품이 선진국 시장을 뚫기는 쉽지 않다. 일단 선진국 소비자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어렵고, 동식물 검역규제를 충족시킬 만큼 기술이나 관리능력도 모자라기 때문이다. 반면 우수한 품질의 선진국 상품은 개도국 시장을 쉽게 파고들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개도국은 이번만큼은 시장 개방의 혜택이 확실히 개도국에 돌아갈 수 있도록 선진국에 대폭적인 시장 개방을 요구하고 있다. 아울러 개도국에는 상당한 특혜가 주어져 시장 개방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선진국은 개도국의 주장을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인 시장 개방은 국내 정치적으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특히 개도국 가운데는 개도국 특혜를 이용하여 자국의 시장은 막아둔 채 선진국 시장 개방의 과실만을 취하려는 개도국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발전 정도에 따라 개도국을 구분해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상업적 이익의 균형을 합의의 전제로 삼는 무역협상이 주고받기가 아닌 어느 일방의 주기만으로는 결코 타협될 수 없다. 농산물이나 공산품, 서비스협상이 부진한 데에는 무역협상을 보는 선진국과 개도국의 이와 같은 시각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선진국을 대표하는 미국과 개도국을 대표하는 중국의 대립이 숨어 있다. 그러니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해결점을 찾거나 미국과 중국의 이해가 일치하는 의제가 아닌 이상 WTO 무역협상에서 어떤 성과가 도출되기는 불가능한 구조다.
WTO 상소기구 문제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지금껏 주장해 온 중국을 대상으로 하는 국영기업이나 산업보조금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없다면 상소기구의 기능 정지는 계속될 것이다. 어쩌면 상소기구란 이름 자체가 WTO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
종합하면 WTO가 직면한 문제는 결코 간단치 않으며 해결에 많은 시간을 요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WTO 다자주의를 보는 우리 시각도 바뀌어야 한다. 다자주의의 복원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실현 가능성 없는 입에 발린 말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차라리 WTO 전 회원국이 아닌 일부 또는 유사한 이해관계를 갖는 국가끼리 복수국 간 협정을 다자주의 회복의 중간단계로 삼자는 제안이 설득력 있다. 주고받기 없는 협상 진전은 불가능함을 개도국에 강조하고 설득력 있는 타협안을 제시하는 것도 개도국에서 선진통상국으로 발돋움한 한국이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