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의 위험성이 세상에 드러난 지 10년 만에 피해자와 기업 간 조정위원회가 꾸려진다. 정부가 피해자 보상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가습기살균제 제조업체 관계자들이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자, 참다 못한 피해자들이 직접 협상에 나선 것이다.
환경부는 31일 김이수 전 헌법재판관을 가습기살균제 사건 조정위원장으로 추천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단체 13곳과 피해분담금을 납부한 18개 기업 중 6개 기업이 이달 초 정부에 조정 의사를 밝히며 위원장 추천을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에서 피해단체와 기업이 상호 조정 단계에 이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정애 환경부 장관은 조정 시도가 늦어진 데 대해 "합의를 이뤄내기 위한 고민은 여러 단위에서 있었지만, 사적 조정 시도에 대해선 깊은 고민이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다"고 털어놨다.
이번 조정에 참여하는 피해신청자는 현재 7,513명이고, 업체는 롯데쇼핑, 옥시RB, 이마트, 애경산업, 홈플러스, SK케미칼이다. 이들 6개 업체가 낸 피해분담금이 전체 금액(1,250억 원)의 98%를 차지한다. 조정이 본격화할 경우 피해신청자와 참여 기업은 더 늘어날 수 있다.
피해자들과 전문가들은 이번 조정 과정에서 피해에 대한 폭넓은 인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현재 정부가 운영하는 피해구제위원회에서는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을 근거로 건강상 피해를 입은 사람 등 일부에 국한해 구제가 이뤄지고 있다. 지금까지 정부가 인정한 피해자는 총 4,120명으로, 지난해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추산한 가습기살균제 건강피해자(95만 명)의 0.43%에 불과하다.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미미하다거나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피해가 없는 건 아니다"라며 "불확실한 2, 3차 질환 발생까지도 폭넓게 구제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정위 구성 또한 민감한 부분이다. 조정위는 법률, 의학 문제를 다룰 전문가 5~7명으로 구성될 예정인데, 피해자들은 가습기살균제 업체 측과 이해관계가 전혀 없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앞서 2016년 조명향 서울대 교수와 유일재 호서대 교수가 업체에 매수돼 제품위해조사를 조작한 것으로 드러나 국민적 공분을 샀던 만큼 위원 선정에 신중해야 한다는 취지다.
조정에 참여하는 한 피해단체 관계자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선입견 없이 듣고 중립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며 "피해자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위원들로 구성되면 조정 자체가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조정위원장을 맡은 김 전 재판관은 1982년 대전지법 판사로 임관해 대법원 재판연구관과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등을 역임하다 2012년 9월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됐다.
김 위원장은 그간 세간의 관심이 높았던 사건들에서 소신 있게 '소수의견'을 제시해 '미스터 소수의견'이라 불리기도 한다. 가장 주목받았던 사건은 2014년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심판으로, 당시 9명의 재판관 중 홀로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2015년 헌재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법외노조로 만든 법률 조항을 합헌 결정할 때도 혼자 위헌 주장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