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영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함께 살기' 실험이 시작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지난달 19일(현지시간) 영국 정부는 실내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 두기 의무를 해제하는 등 코로나19의 방역 조치를 풀겠다는 '자유의 날'을 선포했지만 델타 변이의 막강한 전파력으로 하루 확진자 수가 수만 명을 넘고, 자가격리 대상자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문제는 그 영향으로 산업계 전반이 큰 타격을 입고 있고, 영국 정부는 식품 생산· 공급 분야 등 필수 업종 종사자는 자가격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같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의 미봉책으로는 상황을 되돌리기 쉽지 않다는 걱정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에 상당수 영국 사람들은 벗었던 마스크를 꺼내 스스로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자유의 날을 시작으로 영국에서는 공연장 수용 인원 제한이 사라졌고, 재택 근무 지침도 없어졌다. 지하철에선 마스크 착용을 권고하지만, 법적 의무는 아니다.
하지만 델타 변이라는 복병이 나타났다. 변이 바이러스의 막강한 전파력으로 영국은 하루 확진자 수가 많게는 5만 명까지 치솟았고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방역 조치가 사실상 해제되면서 확진자와 접촉한 자가격리 대상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영국 정부 자료에 따르면 봉쇄 해제 사흘 뒤인 22일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약 4만 명이었고 자가격리 대상자는 60만 명에 이르렀다. 이는 그 전주보다 17% 증가한 수치다.
많은 직장인들이 한꺼번에 격리에 들어가자 일손이 부족해지면서 산업계가 큰 타격을 입게 생겼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영국육가공협회(WEP)는 직원의 5~10%가 자가격리에 들어가면서 식품 공급망이 무너졌다며 정부에 신속한 대응을 호소했다. 이후 대형마트 업체들도 잇따라 재고 부족 사태를 겪고 있다. 운송, 보건의료, 교육, 소매 분야 등도 애를 먹고 있다.
영국의 가디언 등에 따르면 운송 업계에선 인력 부족으로 일부 지하철 노선이 정상적으로 운행을 못 하고 있고, 의료계에서는 급하게 입원을 중단하는 상황까지 일어났다. 교육부는 100만 명 이상의 공립학교 학생들이 코로나19로 결석했다고 밝혔고, 소매업 분야에서는 10~30%의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어 슈퍼마켓 등에서 공급에 차질이 생겼다.
영국 내 자가격리자가 급증하자 '핑데믹'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영국에서는 국민보건서비스(NHS·National Health Service)가 관리하는 앱을 통해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했는지, 자가격리 대상자인지 여부를 알 수 있는데 그 알람 소리인 '핑'이 약 60만 명에게 전해지자 이를 팬데믹(pandemic·세계적 대유행)과 합쳐 만든 말이다. 핑데믹은 자가격리자 급증에 따른 경제 활동 마비도 뜻한다.
문제가 커지자 조지 유스티스 환경부 장관은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상점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며 필수 분야 근로자를 자가격리 조치에서 면제한다고 밝혔다. 자가격리 면제 분야에는 ①식품 생산·공급 ②에너지 ③폐기물 ④물 ⑤의약품 ⑥응급 서비스 ⑦국경 통제 ⑧지방 정부가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백신 접종을 마친 필수 분야 노동자들은 코로나19 감염자와 접촉했더라도 최대 10일의 자가 격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앞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19일 백신을 맞은 사람만 클럽에 입장할 수 있게 하는 등 방역 조치를 해제했다가 이를 번복했다. 이번 조치는 8월 16일까지 한시적으로 시행될 예정이나 구체적 일정을 포함한 지침이 확정되지 않았다.
델타 변이의 급속한 확산에도 방역 규제를 철회한다는 영국 정부의 방침을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위험한 도박'이라는 경고가 꾸준히 제기됐다.
가디언은 5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실내 마스크 착용과 1m 거리 두기 등 코로나19 방역 규제를 2주 뒤부터 해제한다고 예고했을 때부터 방역 일선을 담당하는 NHS가 경악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영국의학협회(BMA) 찬드 나그폴 회장은 별도 성명을 통해 "2주 안에 방역 규제를 철폐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중대 시국에 정부가 그동안 이뤄놓은 방역 성과를 수포로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속도 조절을 촉구했다.
정부에 코로나19 대응을 조언하는 비상사태 과학자문그룹(Sage)의 존 듀리 교수는 "코로나19 확산이 자유의 대가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칼럼 셈플 교수 역시 "가이드라인이 없다면 국민들이 스스로를 지키는 수밖에 없다"며 "(정부 대신) 침묵하는 다수가 결국 방역을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런던 퀸메리대 임상역학자인 딥티 구르다사니 박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정부는 단기 경제 효과를 먼저 생각하며 전문가들의 조언을 무시해 왔다"며 "이번 (보리스 존슨 총리의) 발표는 비윤리적인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코로나19는 감기가 아니다"라며 "어떤 감기가 16개월 만에 40만 명에게 만성 장애를 남기느냐"고 비판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계속 '방역 조치 해제'라는 기조를 유지하는데 그 밑바탕에는 백신 접종이 있다. 영국에서는 성인의 87.9%가 한 번 이상 백신을 맞았고, 68.5%가 접종을 마치면서 입원과 사망 사례가 줄었다는 이유를 들어 방역 규제를 해제했다.
사지드 자비드 보건 장관은 지난달 6일 BBC 라디오와 인터뷰에서 확진자 증가를 경고하면서도 방역 규제 해제 결정을 옹호했다.
그는 "19일쯤엔 하루 신규 확진자가 지금의 2배로 늘어나 5만 명에 달하고 여름이 되면 10만 명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도 "(확진자 증가보다) 중요한 것은 입원과 사망자 수인데, 감염과의 연결 고리는 매우 약해졌다"고 말했다.
스카이 뉴스 인터뷰에서는 "코로나19만 생각하며 살 순 없다"며 "또 다른 질병, 국가 경제의 어려움, 정상적 교육 활동의 진행 차질 등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가격리자 급증 등 여러 변수가 발생하면서 외국 언론들은 영국의 경제 회복에 오히려 어두운 전망을 내놓고 있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7월 영국의 경제 활동은 4개월 만의 최저치로 주춤거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IHS 마킷의 크리스 윌리엄슨 수석 경제학자는 "확진자가 크게 늘면서 소비자의 수요가 줄었고 (대규모 자가격리로 인한) 인력난 때문에 (생산품의) 공급망이 붕괴 직전까지 가 경제 회복이 큰 어려움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블룸버그통신 보도에 따르면 영국 경영경제연구소(CEBR)는 영국 정부가 '핑데믹'을 해결하지 않을 경우 약 63억 달러(약 7조2,000억 원) 이상의 경제적 손실을 볼 수 있다고 전망했다.
특히 CEBR는 영국 정부가 급한 불을 끄겠다고 내놓은 필수 분야 근로자를 대상으로 도입한 자가격리 면제 대책은 예상되는 손실액 중 약 3억 파운드(약 4,700억 원) 밖에 상쇄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시민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규제가 풀리기 직전인 18일 밤, 로이터 통신은 런던의 나이트 클럽과 공연장에 시민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했다. 17개월 동안 텅 비었던 무대를 클러버들이 가득 채웠다. 대다수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고, 일부 시민은 다른 사람과 포옹하기도 했다.
런던의 공연장 '오벌 스페이스'에서 라이브 공연을 연 가수 제임스 콕스는 "마지막 공연은 지난해 핼러윈(10월 31일) 때였다"며 "공연장 소리 점검을 하며 이게 내가 좋아하는 일이구나 다시금 깨달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민은 "춤추고 라이브 음악을 듣고 축제의 분위기를 즐기고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다"며 환영했다.
영국 BBC 방송은 클럽 소유주들이 자유의 날을 크게 반기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다 존슨 총리가 클럽에 입장하려면 백신 접종을 증명해야 한다며 다시 제한을 두자 "매우 실망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일부 시민들은 규제 해제를 걱정했다. 영국 지역지 '맨체스터 이브닝 뉴스'는 시민들이 방역 규제를 '너무 빨리' 해제한 것에 대해 크게 우려한다고 보도했다.
도미닉 윌리엄스는 "아무리 (코로나19) 백신을 맞아도 확진자 수가 늘고 있는데 모든 규제를 해제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항에서 일한다는 조슈아 배스는 "(직업 특성상) 어차피 마스크를 써야 하기에 규제 해제의 즐거움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노인 간병인 캐리 스미스는 "덜 안전해진 것 같다"며 "한 달 안에 봉쇄가 다시 내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빅토리아 포스터 암 연구원은 미국 경제지 포브스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방역 규제 해제가 봉쇄를 의미한다"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코로나19에 취약한 병을 가진 혈액암 환자 등 특정 유형의 환자들은 자유의 날을 오히려 감옥처럼 느낄 것이라고 썼다. 영국 장애인 자선단체 '스코프'는 공식 트위터에 "팬데믹 시기에 임상학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가치가 없다고 느껴왔다"며 "이번 조치는 그 해묵은 얘기의 연장선이 될 것"이라 비판했다.
방역 규제 해제 이후 6일 연속 확진자 수가 줄자 실험이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일고 있지만 방심은 금물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달 27일 영국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수는 2만4,000여 명으로 엿새 연속 감소했다. 17일 하루 5만5,000여 명에 육박했던 것에 비하면 절반으로 줄어든 숫자다. 방역 규제를 풀면 하루 20만 명에 가까운 확진자가 나올 것이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라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그다음 날인 28일 확진자 수는 2만7,000여 명으로 다시 4,000여 명 증가했다. 29일에는 3만1,117명을 기록했다. 스카이뉴스는 자가격리 통보를 받은 인원이 이달 셋째 주에만 1,000만 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확진자 수가 감소한 원인이 집단 면역이라고 보기엔 아직 이르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집단 면역으로 확진자가 줄었다면 그 증가세가 서서히 완만해지다 줄어들어야 하는데 그 수가 갑자기 감소했기 때문이다.
사지드 자비드 영국 보건장관도 코로나19가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리틀 베니스 백신 접종 센터에서 "확진자 감소세가 이어지기를 바란다"면서도 "낙관하기는 이르다"고 경계했다. 이어 "강력한 델타 변이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감소세가 다시 증가세로 들어섰다"며 "상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