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령 기업인이라면 대ㆍ중소기업을 막론하고 대부분 ‘상속세’ 딜레마에 직면하고 있다. 법대로 하자니 경영권을 잃거나 회사 규모를 줄여야 할 것 같고, 절세 방법을 찾자니 자칫 범법자로 전락하기 십상이어서다.
전문가들은 마침표 없는 상속세 갈등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상속세가 지닌 주요 모순점부터 서둘러 정리해 나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20일 재계와 정부 등에 따르면, 상속세 완화 주장의 대표적 근거는 '불합리한 이중과세'라는 지적이다. 생전에 돈을 벌 때 최고세율 45%의 소득세와 법인세 등을 냈는데, 사망 후 상속할 때 또다시 세금을 내는 것은 명백한 이중과세라는 것이다.
임동원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상속세가 높으면 소득세가 낮든지, 아니면 그 반대여야 하는데 한국은 높은 상속세율을 유지하면서 소득세 최고세율도 올리는 추세”라며 “선진국 평균 수준으로 상속세를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상속세는 유산을 상속인의 불로소득으로 간주하고, 세금을 부과해 부의 격차를 최소화하겠다는 뜻에서 출발했다. 부의 이전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세율을 매기는 것이 ‘부의 재분배’라는 조세 취지에 부합한다는 주장도 있다.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상속세의 1차 목적은 부의 대물림을 억제해 부와 권력이 소수에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미국도 상속세는 이중과세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상속받을 권리는 기본권이 아니며, 상속제도는 국가가 이를 특별히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속세는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법대로 상속세를 내다가 아예 경영권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국내 최대 콘돔 제조사이자 한때 세계 1위였던 ‘유니더스’의 김성훈 전 대표는 2017년 회사 보유 주식 중 300만 주(지분율 34.88%)를 바이오제네틱스투자조합에 매각했다. 선친 김덕성 회장에게 물려받은 100억 원 넘는 회사 주식(304만4,000주)에 50억 원 넘는 상속세가 나오자 재원이 부족해 결국 경영권을 매각한 것이다.
‘농우바이오’도 국내 1위 종자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1,000억 원 넘는 상속세 부담으로 2013년 주인이 바뀌었다. 세계 1위 손톱깎이 업체였던 ‘쓰리세븐’도 창업주 김형규 회장이 2008년 별세하자 유족들은 150억 원의 상속세를 내며 가업을 승계하는 대신 회사 지분을 매각했다.
상속세 납부를 위해 지분을 매각해 최대 주주가 바뀌는 경우도 있다. 2017년 세상을 떠난 이수영 OCI 회장의 장남 이우현 부회장은 부친으로부터 6.12%의 지분을 받은 대가로 상속세 2,000억 원을 부과받았다. 이 부회장이 상속세 납부를 위해 지분 일부를 매각하면서 OCI 최대 주주는 이 부회장의 삼촌인 이화영 유니드 회장으로 바뀌었고, 이 부회장은 3대 주주로 내려앉았다.
이에 일부 기업들은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일감 몰아주기’ 등 꼼수를 동원하기도 한다. 오뚜기 계열회사 ‘오뚜기라면’은 2016년 매출(5,913억 원)의 99%를 오뚜기와 내부 거래를 통해 올렸다. 재계는 오뚜기가 ‘무늬만 착한 기업’이라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일감 몰아주기를 한 것은 함영준 회장이 2017년 당시 상속세 1,500억 원을 마련해야 했던 것과 연관이 깊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가업 승계를 위한 가업상속세 공제 제도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대다수 기업이 이 제도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제도 이용 대상이 중소기업으로 한정돼 있는 데다 요건이 까다롭다는 것이다.
중견기업연합회의 ‘중견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중견기업의 84.4%가 세금 부담(69.5%)을 이유로 상속을 포기한다고 답했다. 차선책으로 회사를 사모펀드에 매각하거나 인수합병(M&A)를 고려 중인 중견기업도 적지 않다.
가업상속공제 제도는 가업상속재산 중 최대 500억 원까지 공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업 영위기간 10년 이상, 10년간 대표직 및 지분 유지 등의 요건이 까다롭다. 사후의무요건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위반 기간에 따른 추징률을 곱해 상속세를 부과한다. 매출 3,000억 원을 초과하는 기업은 가업상속에 대한 과세특례제도 적용을 전혀 받을 수 없다.
가업 승계에 대한 반대 여론도 적지 않다. 한때 상속세 부담 때문에 가업 승계를 하지 못한 대표 사례로 꼽혔던 밀폐 용기 회사 ‘락앤락’의 김준일 창업자는 “회사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경영 능력이 입증된 자본에 넘기는 것이 좋다”며 가업승계를 과감히 포기했다. 김 전 회장은 “일본은 수백 년간 가업승계 전통을 지켜왔지만, 경제 활력을 잃고 후퇴하고 있지 않으냐”는 의견을 냈다.
오세형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재벌개혁본부 팀장은 “상장사가 될 정도로 커진 기업은 누구든 해당 사업에 관심 있는 사람이 뛰어들어 경영권을 갖고 운영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 것”이라며 “기존 최대 주주와 그 가족만이 회사의 주인이라는 관점에서 상속세 개편을 논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