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 출신 중년 사내는 세상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난다. 미천한 신분의 청년은 변방에서 중심으로의 진입을 꿈꾼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나 스승과 제자가 되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다 갈등한다. 그들의 우정은 조선 후기 유명 어류 도서 ‘자산어보’를 탄생시킨다. 31일 개봉하는 영화 ‘자산어보’의 줄거리다. ‘자산어보’는 이준익 감독이 ‘변산’(2018) 이후 3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이다. 22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 감독은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라고 자신의 신작을 압축해 표현했다.
영화는 1801년 신유박해로 시작한다. 정조(정진영)가 총애하던 신하 정약전(설경구)은 정조가 승하한 후 동생 정약종(최원영), 정약용(류승룡)과 더불어 사학죄인으로 몰린다. 조카사위 황사영이 천주교 박해를 이유로 프랑스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는 글을 썼다가 참살당하는 ‘백서 사건’까지 겹치며 목숨까지 위태로워진다. 배교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정약전과 정약용은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귀양을 간다.
영화는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만난 청년 창대(변요한)와 맺는 인연, 정약전ㆍ약용 형제의 학문적 교류 등을 붓 삼아 부패로 문드러졌던 조선 후기 시대상을 흑백으로 그려낸다. 신분을 뛰어넘은 우정, 성리학과 실학의 대립, 가렴주구에 고통받던 민초들의 삶들이 교직하며 여러 생각거리를 던진다. 이 감독은 “무슨 영화를 찍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해서 만들었다”며 “계산하지 않고 자료와 현장에서 본 대로 밀고 나가면서 연출했다”고 말했다.
영화의 출발은 동학운동에 대한 관심이었다. 이 감독은 “동학운동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공부하다 보니 그에 앞선 서학을 알게 됐고 ‘자산어보’에까지 이르러 창대라는 인물까지 접하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는 어류의 생태를 꼼꼼히 묘사해내 실생활에 도움을 주려 했던 ‘자산어보’와 정약용의 명저 ‘목민심서’를 대치시키며 당대의 시대정신을 끌어낸다. 이 감독은 “정약용이 (성리학에 바탕을 둔) 이상적 수직사회를 염두에 두고 ‘목민심서’를 집필했다면, 정약전은 새로운 수평사회를 꿈꾸며 ‘자산어보’ 완성에 매달렸다”고 본다. 창대는 정약전의 작업을 도우면서도 ‘목민심서’의 길을 가려 하다 스승과 대립한다.
이 감독 역시 정약전처럼 세상 끝까지 몰린 경험이 있다. "(2000년대 초반) 영화를 수입하다가 쫄딱 망해서 수십억 원의 빚을 졌을 때"다. ‘황산벌’(2003)과 ‘왕의 남자’(2005) 등으로 돈을 벌어 빚을 다 갚았다. 그는 “내 인생은 천당과 지옥의 왕복 달리기”라며 “그래서 ‘자산어보’ 같은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듯하다”고 돌아봤다. “만약 성공 가도만 달렸으면 지금 탐미적인 영화를 만들고 있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자산어보’의 출연진은 화려하다. 주연 설경구와 변요한 외에도 류승룡, 이정은(정약전에게 호감을 나타내며 가까운 거리에서 돕는 가거댁), 방은진(창대 어머니), 조우진(흑산도 별장), 김의성(창대의 아버지 장진사), 동방우(옛 이름 명계남ㆍ나주목사), 윤경호(홍어 장수 문순득) 등이 크고 작은 역을 맡았다. “이준익 감독이기에 가능한 진용”이라는 말이 나올 만한데 이 감독은 손을 내저었다. “시나리오 때문에 좋은 배우들이 많이 들어온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좋은 배우들이 빚어낸 앙상블은 최근 선보인 한국 영화 중 최고 수준이다. 이 감독은 “내가 촬영장에서 한 일은 그저 배우들이 준비한 연기를 받아주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내 촬영장 별명이 원래 ‘컷, 오케이(Cut, OK)’이기도 하다”고 했다. “감독은 신호등이 고장난 사거리에 선 교통경찰이라고 생각해요. 배우들이 직진할지, 좌회전할지, 우회전할지는 시나리오에 이미 정해져 있어요. 감독은 현장에서 배우 각자의 욕망이 부딪히지 않게 조정만 해주면 됩니다.”
이 감독은 ‘황산벌’로 연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자산어보’까지 18년 동안 13편을 만들었다. 상업영화 영역에서 다작이라면 그를 따를 이가 없다. 그는 “영화 공부를 한 적도, 연출부로 일한 적도 없이 열심히 일하다 보니 감독이 됐다”며 “내가 영화를 과연 아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요즘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다음 작품 계획을 물어보자 “나도 잘 모른다”며 “갑자기 (마음에) 꽂히는 인물과 만나면 즉흥적으로 하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송몽규, 윤동주, 계백처럼 아픈 역사 속 의로운 실패자를 좋아해요. 염두에 두고 있는 인물들은 많은데 그들의 삶을 드라마로 축소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느 날 문득 그 인물을 그리게 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