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메이트' 선고 앞둔 피해자들 "무관심에 법정서도 외로운 싸움"

입력
2021.01.10 09:00
[12일 애경·SK케미칼 10년만의 선고]
CMIT·MIT 위해성 입증 안됐던 제품
피해자 노력이 수사·기소까지 이끌어
법정선 피고인 발뺌·언론 무관심 심각
누군간 기록해야 했기에 재판 방청 
"나쁜 기업에 끝까지 책임 묻는 판결해야"

이달 12일 가습기 살균제 제품 중 두 번째로 많은 피해자(833명ㆍ지난해 10월 기준)를 낳은 ‘가습기메이트’ 제조ㆍ판매업체들의 1심 선고 공판이 진행된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의 위해성이 밝혀진 이후 10년 만의 선고다.

가습기메이트는 클로로메칠이소치아졸리논(CMIT)ㆍ메칠이소치아졸리논(MIT)이라는 성분으로 만든 제품이다. 가습기 살균제 원료는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과 CMITㆍMIT 등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PHMG을 사용한 옥시레킷벤키저(옥시) 등의 회사들은 2016년 기소돼 2018년 유죄가 확정됐다. 이번 재판은 CMITㆍMIT를 사용한 제조ㆍ판매사들의 형사책임을 묻는 ‘가습기 살균제 재판 2라운드’인 셈이다.

2,700명이 넘는 압도적 피해자 때문에 ‘가습기 살균제’라고 하면 대부분 옥시를 떠올리지만, 사실 가습기 살균제의 원조는 가습기메이트다. SK케미칼의 전신인 유공이 1994년 국내에서 처음 ‘유공 가습기메이트’라는 이름으로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ㆍ판매했다. 당시 유공은 CMITㆍMIT 성분이 에어로졸 형태로 분무될 때의 위험성을 충분히 검증하지 않았다. CMITㆍMIT는 공업용 향균제로 가정 내에서 사람의 흡입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만든 물질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가습기메이트의 형사처벌이 늦어진 것은 CMITㆍMIT의 위해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피해자들이 제조ㆍ판매사인 SK케미칼ㆍ애경산업 임원들을 고발한 것은 2016년 2~3월이지만 당시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중지됐다. 이후 CMITㆍMIT 위해성에 대한 연구가 쌓이고, 2018년 11월 환경부가 이 자료들을 검찰에 제출한 뒤에야 본격 수사가 시작됐다. 가해기업들은 2019년 업무상과실치사ㆍ치상죄로 재판에 넘겨졌다. 12명이 사망하고, 44명에겐 광범위한 폐손상을 입혔으며, 43명이 천식을 앓게 했다는 게 검찰이 재판에 넘긴 이들의 공소사실이다.

8년 만의 기소 뒤엔 피해자의 분투가

마지막으로 박나원·다원 양의 사진을 제시합니다. 수사 당시 나원·다원 양의 어머니에게 유전자 검사를 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2차 가해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질문은 단 하나, '다른 피해자에게 도움이 되는지'였고 선뜻 응해 주셨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을 해 주셔서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처럼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피해자와 전문가의 노력이 모여 이 재판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2020년 12월 8일 검찰의 최후 변론 중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재판에 이르게 된 것은 피해자들의 분투가 켜켜이 쌓여서다. 지난 10년간 피해자들은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15회에 걸쳐 가해기업을 형사고발도 했다. 청와대ㆍ국회ㆍ기업 앞에서의 집회 및 릴레이 1인 시위는 물론, 전국 자전거 순회로 가해 기업 처벌을 촉구했다. 특히 가습기메이트 피해자들은 “옥시 처벌로 끝난 게 아니다. 아직 처벌받지 않은 기업이 있다”고 호소했다.

그 노력은 재판 모니터링으로 이어졌다. 그중 가습기메이트 피해자 손수연(45)씨는 2019년에 재판의 모든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손씨가 가습기메이트를 사용한 것은 출산 한 달 전인 2004년 12월부터 5개월여지만, 아이는 평생 호흡기 장애를 얻었다. 아이가 성장하며 폐활량 수치가 좋아져 '다행히' 현재는 매일 복용하는 약을 끊은 상태다.

손씨는 위해성 자료를 은폐한 혐의로 기소된 애경산업과 SK케미칼 임원의 재판, 사건 무마를 대가로 애경으로부터 돈을 받은 브로커 재판도 모두 챙기느라 일주일에 두세 번은 서울중앙지법을 찾았다. 재판이 12시간 이상 진행돼 새벽에 끝났을 때도 그는 방청석을 지켰다.

이처럼 손씨가 피해구제 활동에 적극 나서게 된 것은 사회의 ‘무관심’ 때문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특성상 피해자 스스로 피해를 증명해야만 했던 것처럼, 가해기업이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하는 것마저 온전히 피해자의 몫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행동에 나서게 된 결정적 계기는 아이가 수년간 복용한 약의 부작용이 나타난 직후다. 손씨는 “앞으로 피해가 얼마나 더 커질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래서 2018년 중순 피해자 모임을 찾았고, 그해 11월 SK케미칼과 애경의 재수사를 촉구하는 고소ㆍ고발장 접수에 참여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재판 과정도 피해자가 감시해야 하나"

그러나 이후 재판을 모니터링 하면서 손씨는 다시 한번 외로움을 절실하게 느꼈다. 150석 규모의 대법정은 늘 피고인 13명과 함께 부하 직원들 및 대형 로펌 변호사 80여명으로 가득 찼다. 그들에게 우호적인 공간에서 피고인들은 “피해자가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외부에서 PHMG 제품을 흡입해 피해를 입었을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도 펼쳤다.

위해성 자료를 없앤 혐의로 기소된 고광현 전 애경산업 대표의 1심 결심 공판에선 피고인 가족들의 흐느낌이 법정을 채웠다. 손씨는 그때 화를 참지 못하고, 방청석에서 일어나 피해자의 사진을 펼쳐 들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서 큰 수술을 받고 있었던 박나원(10ㆍ당시 8세)양의 사진이었다. 손씨는 “피고인 가족 입장에선 회사에 충성한 죄밖에 없는 가장이 안쓰럽고 억울할 순 있겠지만, 결국 사람이 죽고 다쳤다. 증거를 인멸하며 회사 안위를 생각하기 전에 고통 받으며 죽어간 사람들도 생각해야 한다”며 분노했다.

왜 다른 피해자들은 방청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손씨는 “나는 가사노동자이고 남편도 자영업자라 재판을 볼 여유가 있지만, 다른 피해자들은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병든 몸을 이끌고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5시간 이상 진행되는 재판을 어떻게 챙길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장기간 진행되는 재판일수록 언제 중요한 증언이 나올지 모르는데, 그 내용을 정리해 주는 언론 기사가 없어서 실망했다”며 “논문까지 뒤져가며 자신이 피해자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던 것처럼 재판의 흐름도 피해자가 스스로 챙길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느꼈다”고 말했다.

'가해자 처벌' 기대감 한 켠엔 학습된 불신도

피해자들에겐 법원이 12일 올바른 판단을 해줄 것이란 믿음이 있지만, 한편으론 정부의 늑장 대응과 가해기업의 책임 회피 때문에 학습된 불신도 있다.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지난달 "2011년 질병관리본부가 가습기메이트만 빼고 폐손상 실험을 했다"는 조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아픈 몸으로 복지시설에서 일하면서도 틈틈이 재판을 방청했던 옥시·애경 제품의 복합 피해자 이재성(57)씨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도 피해자들이 나서지 않으면 유야무야되는 현실 때문에 언론과 정부, 기업이 유착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며 ‘조직화된 무책임’을 지적했다. 그는 2015년부터 집회·시위는 물론이고 삭발식까지 참여하며 꾸준히 피해 구제 활동을 했다. 그러면서도 “재판부가 부디 가해 기업에게 ‘피해 책임을 끝까지 져야 한다’는 언급만이라도 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손수연씨는 금고 5년형이 업무상과실치사죄의 법정 최고형이란 걸 알고 "살인과 다름 없는 범죄인데 법리에 막힌 기분"이라며 허탈해하기도 했다. 손씨는 “화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어려운 화학용어를 외워가며 제품을 구매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신뢰가 무너진 사회가 되지 않도록 올바른 판결이 내려지길 바란다. 우리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어른들이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윤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