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의 꿈 이어받은 십대 여공들... '피복노조'의 50년

입력
2020.10.15 04:30
17면
전태일 분신 직후 노조 결성한 십대 여공들
남성만 기억돼 온 50년 노동운동 역사의 숨은 주역
 2020년 '사람답게 일할 권리'는 여전한 숙제



서울 종로구 종로5가 청계천 변의 ‘전태일 동상’ 앞은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말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 청년들의 단골 무대다. 터무니없는 ‘푼돈’ 임금에 미래를 저당 잡힌 이들과, 가진 자들의 이권 다툼으로 법 바깥으로 밀려나 버린 이들이 끊임없이 찾는다. 마이크를 잡은 이들은 그들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제 몸에 불을 붙이고 죽어간 스물 세 살의 청년 노동자 전태일을 소환하며 ‘내가 이 시대의 전태일’임을 토로한다. 올해는 그가 분신으로 생을 마감한 지 꼭 50년째가 되는 해다.



모두가 기억하는 ‘전태일의 죽음' 이면엔 그의 뜻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모인 수천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다. 당시 3만 명에 달하던 동대문 일대 봉제 노동자 중 80% 이상이 10~20대의 '여공'이었다.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13세 소녀가 미싱사를 보조하는 ‘시다’로 들어오기도 했다.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알음알음 전해 들은 이들은 전태일의 어머니 고 이소선 전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초대회장이 만든 노동자들의 둥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청계피복노조’가 꾸려졌다.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전태일 기념관 측이 최초 공개한 사진 및 한국일보 자료사진을 통해 ‘노조하던 여공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1960년대 여공들은 대개 ‘일하는 자’의 권리를 몰랐다. 동대문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 중 70% 이상이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이들이었으며, 고등학교에 다녀본 이들은 단 1%에 불과했다. 허리조차 펼 수 없는 딱 한 줌의 자리에서 이들은 아까운 젊음을 축냈다. 기억이 남아 있는 유년 시절부터 성인기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공장 안에서 일생을 보낸 이들은 바깥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여성은 언제나 가장 ‘싼값’에 부리는 노동력이었다. 이들은 1년 내내 아침 7시 출근해 밤 11시 30분을 넘겨 퇴근할 때까지 매일 16시간씩 일했다. 한 달에 휴일은 하루뿐이었으니, 주당 110시간씩 일을 한 셈이다. 엉덩이에 가위가 박힌 줄도 몰랐고, 다락에서 새우잠을 자며 일하던 미싱사들이 졸다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번 돈은 전쟁으로 풍비박산 난 집안 살림을 다시 세우는 데에 보태졌고,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로 들어갔다. 돈 있는 자들에게 60년대는 봉제 공장 몇 년이면 ‘갑부’가 된다는 호시절이었고, 그 사이 무수한 여공이 빈혈이나 폐병으로 죽거나 쓰러졌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죽음을 목격한 여공 몇몇이 제 발로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씨와 그의 친구들을 찾았다. 이소선 전 회장은 아들의 유언을 받들어 “노조 결성을 허해주지 않을 시엔 장례식을 진행하지 않겠다”며 버텼고, 그 결과 11월 27일 ‘청계피복지부’가 탄생했다. 그 후 수많은 여공이 머뭇거리는 발걸음으로 노조 사무실을 찾았다. 어떤 이는 말없이 찾아와 전태일의 어머니를 꽉 안아주었고, 어떤 이는 손수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 판 돈을 ‘운영비로 써 달라’며 내밀었다. 봉지 가득 떡을 사 들고 찾아오거나, 사장의 눈을 피해 들러 수줍게 인사를 하고 가는 이들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노조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노조는 깡패 집단’이라는 공장 사장들의 악선전에 대다수 노동자는 가입을 주저했다. 일단은 ‘서로 친해지며 설득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했다. 그렇게 여성 노동자들의 소모임인 ‘아카시아회’가 생겼다. 거기서 여공들은 처음으로 ‘일터 바깥'에서 또래 친구들을 만났다. 함께 한문을 배우고 숫자를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제 이름으로 된 통장을 만들었고, 여러 명이 힘을 합해 열 살이 겨우 넘은 어린 시다(보조원)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당시 공장장들은 여공들을 이름이나 직책 대신 ‘1번' '2번’하며 죄수 부르듯 불렀다. 여공들은 자신부터 후배 시다들에게 높임말을 쓰며 일터의 문화를 바꿔나갔다. 아카시아회에서 함께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다. 고 이소선 전 회장은 중학교도 못 간 여공들을 위해 ‘평화 새마을교실’을 열었고, 이화여대 학생들이 무급으로 국어와 역사 등을 가르쳤다. 이른바 ‘야학’의 효시였다. 7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열리는 강의에 200명이 몰렸다. 물론 제때 퇴근하지 못해 수업을 듣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었지만,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대단했다.


깨우침이 늘수록 바꾸고 싶은 것도, 누리고 싶은 것도 많아졌다. 사람을 기계처럼 부리던 70년대, 여공들은 ‘존엄할 권리’를 말하기 시작했다. 더디게나마 임금이 올랐고, 저녁 8시 퇴근이 ‘상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80년대, 노조 간부들이 옥살이를 하고 조직이 해체되는 와중에도 청계천 여공들은 점조직으로 움직이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면회를 가고, 영치금을 넣고, 모임의 명맥이 끊기지 않도록 끈질기게 서로를 불러냈다. 노동운동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지만, 좌절의 시대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이 여성 노동자들은 그 이름 뒤에 ‘숨은 주역’이었다.


전태일 재단이 공개한 사진 속, 이들의 모습은 밝고 명랑하다. 여름이면 땀띠 위에 먼지가 앉아 얼굴 가득 고름이 피고, 겨울이면 솜에서 나온 분진 때문에 기침을 달고 산 이들의 일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카시아회에 오던 시간이었다. 난생처음 생긴 친구들과, 난생처음 봄꽃 핀 산에 나들이를 가서 찍은 사진들에선, 그들이 느꼈을 기쁨과 환희가 표표하게 드러난다. 싸움은 언제나 고되고 지난했지만, 나도 '존중받아야 할 귀중한 존재’임을 깨우친 그들의 얼굴은 단단하게 낙관적이다.



전태일이 분신한 뒤 50년이 지났고, 세상은 바뀌었다. 사문화된 법이 아니라, 피부에 닿는 법이 ‘최저임금’을 정하고 ‘법정근로시간’을 엄격하게 책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답게 일할 권리’는 여전한 숙제다. 따라서 전태일은 아직 지나간 시대의 잊힌 상징이 아니다. 꿈을 빌미로 무급노동을 강요받는 청년들과, 외주화된 위험에 내몰리는 청년들이, 오늘도 전태일과 여공들이 서 있던 자리에서 노동의 가치를 묻고 있다.



박지윤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