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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나치화 질타했던 아우슈비츠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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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교훈
유대인을 벌레로 교육받은 나치의 비인간화 학살
종교로 변질된 홀로코스트
인류 최악 피해자란 타이틀, 시오니스트들이 이용
죄의식 없는 폭력 불러 팔레스타인에 참담한 고통
"피곤하게 살겠다" 약속대로
가자지구 침공ㆍ식민화 반대, 이스라엘 편 드는 서방 비판
분노의 목소리 여전히 큰 울림
1월 27일은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이다. 외신들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흑백 사진들과 함께 추념식장에 모인 서방 주요 정치인들이 헌화하고 묵념하는 장면들을, 휴머니즘의 감동적 연설과 함께 전하곤 한다. 2005년 유엔 총회는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이 1945년 이날 해방된 것을 기려 기념일로 제정했다.
2010년 추모 행사를 하루 앞둔 1월 26일 영국 런던대학에서는 ‘국제 유대인 반시오니스트 네트워크(IJAN)’와 현지 시민단체인 ‘스코티시 팔레스타인 연대 캠페인’이 주최한 대중 강연회 ‘Never Again, For Anyone’이 열렸다. 그 같은 제노사이드가 두 번 다시, 누구에게도 되풀이 돼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저 행사가 겨냥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제3제국과 파시즘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그들의 시오니즘(호전적 민족주의)이었다.
네덜란드 국적의 독일계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86세의 하요 메이어(Hajo Meyer)가 연단에 섰다. 그는 저 홀로코스트 추념식장의 이스라엘과 영ㆍ미 우방국 정치인들의 범죄와 위선을, 국제사회의 침묵과 방조를 거침없이 성토했다. “아우슈비츠에서 나는 다른 누군가를 비인간화(dehumanize)하려는 자는 먼저 스스로 비인간화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어떤 유니폼을 입었든- 독일 군복이든, 죄수복이든- 압제자는 더 이상 진정한 인간이 아닙니다.”백발의 그는 자신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 그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innovative minds, 2010.1.26)
유럽유대인평화연대의 일원인 네덜란드의 반시오니즘 유대인 모임 ‘A Different Jewish Voice(유대인의 다른 목소리)’위원이자 IJAN 멤버로, 반시오니즘과 팔레스타인 인권 운동에 헌신했던 하요 메이어가 8월 22일 네덜란드 레이스베이크 자택에서 숨졌다. 향년 90세.
메이어는 반유대주의자였다. 그는 에드워드 사이드나 노엄 촘스키처럼 저명한 학자도 직업적인 정치활동가도 아닌, 평범한 유럽 시민이었다. 특별하다면 나치 강제수용소에 갇혔다가 살아난 이력쯤이겠으나, 죽음의 행진을 피해 수용소를 나온 이는 부헨발트 2만명 등 약 10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가둔 철조망 안에서, 그리고 살아나온 뒤에도, 희생자로서의 자신과 자기 민족을 특권화하는 대신 그들을 가둔 가해자와 함께 갇혔던 희생자들을, 그들의 내면을 객관화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자신이 겪고 깨달은 바를 세상에 알렸고, 재발 방지(Never Again)를 위한 인류의 헌신에 앞장섰다. 그럼으로써 그는 특별해졌고 고귀해졌다.
알려진 그의 사적인 삶은, 강연 등 공적인 활동 중에 스스로 밝힌 게 거의 전부다. 그는 1924년 8월 12일 독일 비에레펠트(당시는 프로이센 웨스트팔리아 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38년 11월 9일 이른바 ‘수정의 밤(Cristal night)’사건이 일어난다.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의 3등 서기관 한 명이 17살 독일계 유대인 청년에 의해 암살당한 그 일을 빌미로 나치 경찰과 군대는 유대인의 집과 상점, 종교시설을 조직적으로 불지르고 파괴한다. 또 유대인을 무차별 구타하고 연행한다. 14살이던 그는 그 일로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그 날 이후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된 거였다. 나치는 유대 청소년의 교육 기회를 박탈했다. 그는 ‘에모리 휠’이라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떠올리며 “제노사이드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다”고 말했다. “그 중 한 형태가 교육을 통해 자신의 퍼스낼러티를 개발하고자 하는 젊은이에게 그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대규모 강제추방도, 굶기는 것도 제노사이드이고, … 그 형태는 무수히 많다.” 다른 인터뷰에서는 교육기회의 박탈을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학살’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메이어는 이듬해 혼자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나지만 전쟁과 함께 네덜란드를 장악한 나치는 43년 4월 대대적인 유대인 현황조사를 시작한다. 그는 지하로 잠적해 약 1년 동안 유대계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다 체포된다. 스무 살의 그는 아우슈비츠에 10개월간 갇혀 있다 나왔지만, 그의 부모는 살아남지 못했다.
2010년 허핑턴포스트에 기고한 ‘배반당한 윤리적 전통(An Ethical Tradition Betrayed)’이란 글에서 그는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게 두 가지 행운 덕이라고 밝혔다. 하나는 네덜란드 고학시절 익힌 열쇠수리 기술 덕분에 수용소 내 공장에서 일하면서 44-45년 겨울의 혹한을 모면할 수 있었던 거였고, 또 하나는 ‘조스(Jos)’라는 친구를 만난 거였다. 그는 콩나물 시루처럼 비좁은 수용소 감방에 갇혀 부대끼다 보면 누구나 극단적인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며 “그와의 우정이 있어, 서로 돕고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있다는 신뢰가 있어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게 나를 심리적으로 죽지 않게 해준 활력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강제수용소를 자신들 유대인을 비인간화하는(비인간화하기 위한) 공간으로 이해했다. 유대인을 벌레로 교육받고 세뇌 당한 나치 군인에게 수용소의 유대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고, 비인간적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됐다. 그런 비인간화의 논리는, 상황과 체험을 통해 피해자에게도 내면화한다. 그가 심리적 생존의 활력이라고 했던 우정, 그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공감, 다시 말해 자신의 인간성과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게 해준 거멀못 같은 거였다. 그는 인류가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통해 간직해야 할 교훈이 있다면, 다시는(Never Again, 그리고 누구에게도(For Anyone), 그런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그에게 아우슈비츠의 기억은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과 아랍 이웃들에게 행하는 행태를 통해 끊임없이 환기됐다. 그는 이스라엘이 시오니즘적 야심과 범죄를 감추기 위해 아우슈비츠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상징적인 존재로 메이어는 198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인 작가 엘리 위젤(Elie Wiesel)을 들곤 했다. 역시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위젤의 논지는 한 마디로 ‘그 어떤 것도 홀로코스트에 비할 수 없고, 이후의 그 무엇도 홀로코스트와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메이어는 2010년 런던 강연에서 “이스라엘에서 유대교는 홀로코스트라는 신흥 종교로 대체됐고, 그 종교의 대제사장이 엘리 위젤”이라며 신랄한 어조로 비판했다. “위젤은 아우슈비츠를 ‘시나이의 경험(모세가 10계명을 받은 신학적 사건)’에 비유하곤 한다. (…) 그 맥락 안에서 유대인은 지구상 그 어느 누구도 겪은 적 없고, 겪을 수도 없는 가장 참담한 고난의 독점적 주체가 되며, 우리가 누구(팔레스타인인)에게 어떤 짓을 하든 그것은 우리가 겪었던 것에 비할 수 없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죄의식 없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계율적 근거를 마련한다.”
연설에서 그는 아리안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영장 없는 체포, 인간을 벌레에 비유하는 교육과 선전, 조직적 세뇌와 학살이 지금 시오니스트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에게 행하는 짓들, 그리고 그들 자신의 자녀들에게 행하는 교육과 얼마나 똑같은지 사례를 들어 비교하기도 했다.
2010년 유럽에 이어 2011년 1월 24일부터 2월 19일까지 그는 미국 12개 도시와 캐나다 토론토를 돌며 ‘Never Again’강연을 이어갔다. LA에서의 마지막 강연을 앞두고 독립매체인 ‘카운터 펀치’와 가진 인터뷰에서 ‘예루살렘 포스트’ 등 이스라엘 언론들이 자신을 반유대주의자로 소개하는 사실에 대해 그는 당당한 어조로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반유대주의자는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즉 유대인 천성과 민족성 때문에 그들을 미워했지만, (나와 같은) 지금의 반유대주의자가 미워하는 것은 시오니스트다. 과거 나치의 돌격대장 헤르만 괴링이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정한다’고 말했듯이, 지금 시오니스트들은 누가 반유대주의자인지 자신들이 정하고 있다.”
그 역시 유년 시절 유대주의 종교적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 ‘인티파다 팔레스타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비록 무신론자이긴 하지만 어릴 적 교육받은 계몽적이고 개혁적인 유대교의 가르침과 사회문화적 전통에 애착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기억하는 유대교의 윤리적 전통은 시오니즘의 바탕과 전혀 다르다. 유대교는 보편성과 인간성에 기초하고 있지만 시오니즘은 아주 협소한 국가주의와 인종주의 식민지주의의 합성물일 뿐이다. (…) 시오니즘은 그것이 만들어지던 19세기말 제국주의 국가들의 보편적인 논리와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된 뒤 네덜란드로 돌아가 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했고, 필립스전자에 입사해 사내 물리연구소장을 지내는 등 직업인으로서 썩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퇴직 후 바이올린과 비올라 디자이너로도 일하면서 여러 반시오니즘 유대인단체에 적을 두고 활동을 이어왔다.
그가 유럽과 미국, 특히 이스라엘 사회에 크게 이름을 알린 것은 2009년 저서 유대정신의 종말(The End of Judaism) 덕이 컸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강연 활동과 영미와 아랍권 중소 독립매체 인터뷰-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LA타임스 등 유대 자본의 미국 유력지와 AP UPI 영국 로이터 등 통신사 어디에서도 그의 책 리뷰나 인터뷰, 심지어 부고 기사를 싣지 않았다-가 보도되기 시작한 것도 대부분 책 출간 이후부터다. 책을 낸 동기에 대해 그는 아랍권 온라인 매체인 ‘일렉트로닉 인티파다(The Electronic Intifada)’와의 인터뷰에서 유럽 언론이 오스트리아의 극우 자유당(FPO) 당수 요르그 하이더(2008년 사망)나 프랑스의 장 마리 르팽에 대해서는 보도하면서 2001년 이스라엘 수상에 당선된 파시스트적 성향의 정치인 아리엘 샤론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을 보고 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나는 모든 인간을 동등한 관계 속에 두는 것을 핵심 가치로 여기는 유대주의의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 이스라엘의 시오니스트들은 홀로코스트를 모른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영토 확장과 팔레스타인인 축출의)편집증을 주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홀로코스트를 이용할 뿐이다.”(2009.6.1)
장래 계획을 묻는 질문에 85세의 그는 “내가 몇 살인지 아느냐”고 웃으며 반문한 뒤 “나는 항상 스스로를 조롱하듯 내겐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하곤 한다.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늘 피곤하게 사는 것과 얌전히 떠날 날을 기다리는 것. 내 계획은 피곤해지겠다는 거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948년 12월 갓 건국한 이스라엘의 자유당 당수 메나헴 베긴이 미국을 방문한다. 그는 그 해 4월 데이르 야신 마을 아랍인 주민 학살의 실질적 책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12월 2일자 뉴욕타임즈에는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한나 아렌트 등 40여 명이 서명한‘뉴욕타임즈 편집자에게 드리는 편지’라는 글이 광고 지면에 실렸다. 서명자들은 “과거의 행태에 비춰 보건대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빚어질 지 예견할 수 있다”며 미국이 이스라엘의 극우화를 경계할 것을 촉구했다.
2014년 8월 1일자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 워싱턴포스트, 가디언지에는 엘리 위젤의 광고 글이 실렸다. ‘3,500년 전 유대인은 아이의 희생을 거부했다. 이제 하마스의 차례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하마스를 나치에 비유했다. 위젤은 구약의 아브라함이 신의 뜻으로 이삭에게 들었던 칼을 내린 구절을 환기하며 이제 하마스가 무기를 내려야 한다고, 하마스 탓에 팔레스타인 아이들과 민간인들이 희생을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 글 위에는 복면을 한 채 로켓포를 짊어진 하마스 군인의 사진이 얹혀 있었다.
그리고 8월 23일자 뉴욕타임즈에는 위젤의 저 광고를 반박하는 반시오니스트 유대인들의 성명서가 역시 전면 광고로 실렸다. 나치수용소 생존자 43명과 자녀 등 모두 327명이 서명한 이 글은 “가자지구에서 자행되고 있는 학살과 팔레스타인 점령 및 식민지화를 우리는 비판한다. 나아가 우리는 이스라엘이 공격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한 미국, 이스라엘을 외교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서방 국가들도 비판한다”고 밝히고 있다. 글의 끄트머리에는 “우리는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한 엘리 위젤의 행태에 역겨움과 분노를 느낀다”는 구절도 딸려 있다. ‘NEVER AGAIN FOR ANYONE!’으로 끝을 맺는 이 글의 서명자 명단 맨 앞에는 하요 메이어가 있었다. ‘피곤하게 살겠다’던 약속대로, 아니 숨을 거둔 뒤에도 그는 저렇게 호소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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