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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나를 따라다니는 유령은 '과거의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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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M 피어시그 지음ㆍ장경렬 옮김
문학과지성사 발행ㆍ800쪽ㆍ1만8,000원
부록을 제외해도 720여 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미국 소설을 효과적으로 읽으려면 작가인 로버트 M 피어시그(82ㆍ사진)의 이력부터 살필 필요가 있겠다. 선(禪)과 모터사이클이라는 이질적 명사를 결합한 제목의 이 작품은 작가가 46세 때인 1974년 발표한 그의 첫 소설로, 과학에서 시작해 철학으로 옮겨간 그의 지적 편력과 정신병원에 입원할 만큼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던 삶의 이력이 고스란히 바탕을 이루고 있다. 화학을 전공하다가 대학을 중퇴하고 한동안 한국에서 군 생활을 했던 그는 이후 미국과 인도의 몇몇 대학에 적을 두고 동서양 철학을 공부했다. 1960년부터 7년 동안 중증의 우울증을 앓으면서 뇌에 직접 전기 충격을 가하는 치료를 받기도 했다.
서사의 중심 뼈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주인공 ‘나’가 아들 크리스와 함께 모터사이클로 미국 중서부 미네소타에서 남서부 캘리포니아를 가로지르는 17일 간의 여행. 또 하나는 작가의 이력을 빼닮은 회고담을 포함하는 ‘나’의 철학적 사유로, 주인공 스스로 ‘야외 강연’이라 일컫는 이 부분은 소설 제목의 두 명사가 각각 상징하는 정신과 물질의 통합적 사유를 모색하는 고급 철학 에세이로 따로 떼어 읽어도 좋겠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동서양 철학과 미국 대륙이라는 광활한 두 영역을 동시에 가로지르는 이중의 여행소설인 셈이다.
‘나’는 여행 초반부터 ‘파이드로스’라는 유령이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느끼는데,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의 이름을 딴 이 유령의 정체는 곧 과거의 ‘나’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정신병원에서 전기 충격 치료를 받고 잃어버린 주인공의 기억이 점차 돌아오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공학 기술, 모든 현대 과학, 모든 서양 사상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합리성이라고 하는 유령”(155쪽)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한 파이드로스의 지적 편력은 과학ㆍ본질ㆍ분석 중심의 ‘고전주의적 세계관’과 예술ㆍ현상ㆍ직관 중심의 ‘낭만주의적 세계관’의 충돌이라는, 서구 사회의 면면한 철학적 난제와 맞닥뜨리고 결국 정신분열증까지 겪게 된다.
‘나’에게 돌파구를 제공한 개념은 질(質). ‘가치’로 이해해도 좋고 궁극적으로는 주객(主客)의 분별을 지우는 불교적 선(禪)과 통하는 이 개념을 통해 주인공은 정신과 물질, 본질과 현상을 양 축으로 하는 뿌리깊은 이분법적 사유를 한데 결합할 방도를 찾는다. “질(낭만적 질)과 그 질의 현시(고전적 질)는 본래 하나이고, 이것이 품위를 갖추고 그 모습을 드러내면 서로 다른 이름(주체와 객체)이 주어지나니.”(447~448쪽) 주인공은 이를 다른 관점에서 말하기도 한다. “인간적 가치와 기술 공학적 요구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기술 공학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이 아니다. 기술 공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가로막는 이원적 사유라는 장벽을 무너뜨리는 데 있다.”(516쪽)
소설은 이념 갈등이 극심했던 1950년대와 극단적인 반(反)물질문명을 표방하는 히피가 출현한 1970년대의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제시하며 자칫 사변적으로 흐르기 쉬운 주인공의 사유에 생생한 몸을 입힌다. 복잡한 부품 체계인 모터사이클을 직접 수리할 줄 아는 ‘나’와, 기술공학을 수동적 안락함의 수단으로만 여기며 손에 기름 묻히는 것을 혐오하는 서덜랜드 부부_이들은 주인공 부자의 여행 초기 동행이었다_의 대비 또한 소설의 철학적 주제를 흥미롭게 형상화한다.
소설에서 이야기의 감동을 주는 부분은 주인공 부자의 관계다. 되살아나는 기억과 대면하면서 과거와 현재의 자아를 통합하고자 힘겨운 내면의 투쟁을 벌이고 있는 주인공은 아들과의 여행을 괴테의 시 ‘마왕’에 빗대며 결국 악마에게 아들을 내어준 시 속의 아버지가 돼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크리스 또한 그런 아버지에게 소외감을 느끼는 한편 스스로도 정신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부자 사이는 여행 내내 악화일로를 겪는다. 하지만 소설 말미에서 두 사람은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환상의 공간에서 감춰왔던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발견한다. “아빠, 정말로 정신이상이었어요?” “아니!” “아닌 줄 알았어요.”(728쪽)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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