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사 최초 '지속가능공연보고서'

입력
2024.03.28 22:00
26면
아이돌 그룹 ‘트레저’ 콘서트의 장애 팬 접근성 안내 유튜브 동영상 캡처.

아이돌 그룹 ‘트레저’ 콘서트의 장애 팬 접근성 안내 유튜브 동영상 캡처.

케이팝을 좋아하는 고등학생 딸은 수도권 웬만한 큰 콘서트장의 휠체어석 위치를 줄줄 꿰고 있다. 이런 큰 공연장에 휠체어를 타는 딸이 가려고 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아예 휠체어석 자체를 예매할 때 배제해 버리는' 것이었다. 몇 년 전엔 휠체어석이 있는 공연장임에도 휠체어석 예매를 열어놓지 않았던 아이돌 콘서트에 대해 딸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문제를 제기했고 다른 비장애인 팬들이 함께 목소리를 높인 덕분에 그다음 해에는 휠체어석 예매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런 아이가 얼마 전 방송사 음악 프로그램 공개방송을 다녀왔다. 방송사 공개홀은 휠체어석 여부도, 어떻게 접근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전혀 정보가 없다며 난감해하더니 "일단 가서 부딪쳐 보겠다"며 다녀온 것이다. 계단 대신 우회로를 통해 맨 앞 좌석을 안내하거나, 휠체어째 스태프들에게 들려서 이동했다고 한다. 딸아이의 전반적 진단은 이랬다. 방송사 공개홀은 콘서트장에 비해 휠체어 접근성이 많이 불편했지만 스태프들이 매우 친절해서 도움을 잘 받을 수 있었다. 휠체어 탄 딸을 투명인간 취급한 딱 한 방송사를 제외하고.

이렇게 공연장 접근성에 대해서는 박사 수준인 딸이 내게 카톡을 보낸 날이 있었다. "엄마. 트레저란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직접 공연장 시각장애인, 휠체어 이용자 접근성을 안내하는 동영상이 떴어." 아이와 신이 나서 이야기를 나눴다. "와, 이렇게 하려면 정말 공을 많이 들여야 할 텐데. 물리적 접근성만 안내하는 게 아니라 예매 단계부터 접근성을 고려해야 하고, 콘서트 현장에 사람도 배치해야 할 텐데 말야. 이렇게 하는 게 설마 일회성은 아니겠지?"

과연 그랬다. 27일 트레저의 소속사인 YG엔터테인먼트에서 발간한 '지속가능공연보고서'에는 '공연 접근성 향상'이 한 섹션으로 구성돼 있었다. 엔터사로는 국내 최초로 이런 공연 접근성 부분을 자세히 다룬 것이다. 공연에서 장애인 팬을 위한 '접근성 매니저'를 배치하고, 정보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예매 절차부터 신경 쓴 과정이 쓰여 있었다. 놀랍게도 작년 장애인권대학생네트워크 의뢰로 '무의'가 68명의 장애인 케이팝 팬에게 '공연 접근성'에 대해 설문조사를 돌렸을 때 나왔던 제안 사항들이 상당수 실현돼 있었다.

딸과 보고서를 보고 이야길 나눴다. 딸은 공연 전 장애 팬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면 되는지' 사전 설문을 받은 게 가장 인상 깊었다고 했다. 나는 이 부분이 가장 맘에 들었다. "예매 절차에서 일부 장애인 팬들이 일반석을 구매하는 불편이 있었습니다. 추후 더 보완하겠습니다." 기업이 일반에 공개하는 이런 종류의 보고서엔 성과만 담는 경우가 많은데 한계점까지 쓴 것이다.

장애 접근성에는 100% 완벽한 건 없다. 장애 접근성은 어떤 목표라기보다는 과정에 더 가깝다. 장애는 장애인 수만큼 다양하기 때문이다. 장애 접근성에 법적인 기본 의무를 지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이만큼만 하면 되겠지'라며 법적 의무만 딱 달성하고 외면한다면 다양한 장애인 고객들의 니즈를 담기는 어려워진다. 접근성을 '달성 과정'으로 보고 지속가능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 기업문화로 만들려는 노력은 이래서 중요하다.

비단 장애고객뿐일까. 다양한 팬층을 포용하는 '모두의 공연'은 케이팝의 필수 조건이 됐다. 트로트 열풍으로 고령층 고객들이 콘서트장에 가는 일이 늘어났다. 임영웅 콘서트에서는 안내판 글씨를 키우는 등 장애 접근성 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후문을 들었다. 케이팝 열풍은 외국인 팬들의 국내 방문도 증가시킨다. 한국어와 공용어인 한국수어를 비롯해 어떤 언어를 쓰는 팬이라도 공연을 최대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정보 접근성 확대 조치도 필요하다.

내 딸은 학교가 끝나면 '투명인간'이 되곤 했다. 놀이터도 학원도 휠체어 접근이 도통 불가능해서 친구 사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가 혼자 지하철을 타고 외출에 나설 수 있었던 건 같은 케이팝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트친(트위터 친구)' '인친(인스타 친구)'들 덕분이었다. '지속가능공연보고서'가 더 많은 곳에서 나오길 바란다. 더 많은 장애 팬이 바깥으로 나오면 그들의 세상은 물론 그들과 함께하는 수많은 '인친'들의 관점 또한 넓어질 테니. 그때쯤 되면 휠체어 이용자를 투명인간처럼 보던 모 방송사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홍윤희 장애인이동권증진 콘텐츠제작 협동조합 '무의'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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