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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애국주의 그리고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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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전장의 군인뿐 아니라 후방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지탱된다. 전시 애국주의는 인간적인 가치와 최소한의 권리조차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자리 잡고, 전장의 희생은 탄광과 공장 등 노동자 시민이 겪는 고통을 정당화하고 응당한 항변조차 비애국적 이기심의 발로로 규정하는 근거로 활용된다. 극단의 희생이 나머지 희생을 영속화하는 전시 애국주의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정치-자본 권력에 의해 적어도 한동안은 관성처럼 유지된다. 1차대전 직후인 1920년대 미국 노동운동이 괴멸 지경에 이른 배경에도 반공주의와 결합한 애국주의가 있었다.
2차대전 전후인 195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은 워낙 잘 알려져 있지만, 1차대전 전시에도 미국은 1917년 간첩법(Espionage Act)과 선동법(Sedition Act, 1918) 등으로 편집증적인 애국-반공공포체제를 강화했다. 노동운동은 이슈가 뭐든 공산-무정부주의자들이 벌이는 반정부-반체제 위협으로 규정됐다. 힘겨운 전시를 버텨 전후 되살아난 노동운동은 하지만, 전장에서 살아온 엄청난 예비 노동력과 경쟁해야 했다. 1919년 시애틀 총파업 당시 시장이던 올레 핸슨은 “모든 시민이 미국주의를 보여줄 때가 왔다. 지역사회를 빨갱이와 무정부주의자들이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선동했다. 그해 빚어진 보스턴 경찰 파업도 마찬가지였다. 열악한 근무 여건과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급여에 항의하며 시 경찰의 4분의 3인 1,100여 명이 가담한 그 파업을 두고 우드로 윌슨 당시 대통령은 “문명에 대한 범죄”라고 규정했고, 한 언론은 “파업 참가자의 시민권까지 박탈해야 한다”고 썼다. 파업 경찰은 전원 해고됐고, 빈자리는 베테랑 군인들로 신속하게 채워졌다. 웨스트버지니아 탄광 파업(1920~22) 진압에는 전투기까지 동원됐다.
1919년 약 400만 명에 달했던 미국 조합 노동자는 대공황이 시작된 29년 무렵 약 30만 명으로 격감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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