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괏값이 올라도 썩은 사과는 안 먹는다

입력
2024.03.18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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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막말로 4·10 공천이 취소된 도태우(왼쪽부터) 변호사, 정봉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장예찬 전 국민의힘 청년최고위원. 한국일보 자료사진

과거 막말로 4·10 공천이 취소된 도태우(왼쪽부터) 변호사, 정봉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장예찬 전 국민의힘 청년최고위원.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상기후로 사과(沙果)는 전례 없는 흉년이라지만, 4·10 총선을 앞둔 정치권은 사과(謝過) 대풍년을 맞았다. 공천이 확정된 여야 후보들은 과거 막말 논란이 불거지자 줄줄이 사과했다. 국민의힘에서는 대구 중·남구 후보였던 도태우 변호사가 2019년 5·18 폄훼 발언으로 사과했고, 부산 수영구 후보였던 장예찬 전 청년최고위원도 10여 년 전 페이스북에 올린 문제적 발언으로 사과했다. 2017년 페이스북에 "일제강점기에 더 살기 좋았을지 모른다"고 한 조수연 대전 서갑 후보도 사죄의 절을 했다. 더불어민주당 서울 강북을 후보였던 정봉주 전 의원은 2017년 '목발 경품' 막말 논란으로 사과했고, 양문석 경기 안산갑 후보는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 비하 논란으로 사과했다.

때늦은 사과는 국민의 입맛을 맞추지 못했다. 거센 비판 여론에 여야는 도태우·장예찬·정봉주 후보 공천을 잇달아 취소했다. 이들의 사과는 왜 실패했을까. 저명한 미국의 심리학자 존 달리와 게리 채프먼 등에 따르면 성공적인 사과는 크게 △후회 표현 △책임 인정 △보상 △재발 방지 △용서 간청으로 이뤄진다. 진심을 다해 잘못을 인정하고, 구체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표명하고, 정확한 보상을 제시하며,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대책을 약속하고, 마지막으로 상대에게 용서를 청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에 비추면 논란이 된 후보들의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 '5·18 민주화운동 북한군 개입설' 주장 논란이 빚어진 도 변호사는 사과문에서 "정제되지 못한 발언으로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그러나 '5·18 북한군 개입설' 주장은 일부 언론의 명백한 오보"라고 했다. '미안하지만 언론이 잘못했다'는 전형적인 책임 회피다. "사적 공간이라 치기 어린 표현을 가볍게 남겼다", "어려운 아이들에게 후원을 독려하며 쑥스러운 마음에 일부러 강한 표현을 썼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러 민원에 시달리다 부적절한 표현을 남겼다"고 한 장 전 최고위원의 사과도 잘못을 회피해 책임 인정 단계에서 탈락했다. 북한 목함 지뢰 피해 장병들에게 직접 전화로 사과했다고 했다가 피해 장병들이 사과받은 적이 없다고 항의하자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에게 사과했다”고 해명한 정 전 의원의 사과는 변명에 가깝다.

성공적인 사과의 조건인 피해 보상이나 재발 방지는 언감생심. 이들 모두 사과는 해도 후보직에서 스스로 물러나진 않았다. 막말 후보를 걸러내지 못한 각 당은 "진정성 있는 사과", "표현의 자유" 등을 운운하며 감싸기에 급급했다. 심지어 공천이 취소된 도 변호사는 "다시 한번 검증을 받겠다"며 해당 지역구에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이쯤이면 사과의 대미를 장식할 용서는 성립될 수 없다. 사과는 가해자가 하지만 용서는 피해자가 한다. 막말 논란으로 사과한 여야 후보에 대한 용서는 국민의 몫이다. 하지만 용서를 구하지 않으니 용서할 방법이 없다. 24년 전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은 가수 강원래는 최근 “가해자가 사과했었다고 말하고 다니면 평생 그를 원망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잘못된 사과는 상대의 원망과 상처만 부른다. 사괏값이 아무리 올라도 썩은 사과는 아무도 먹지 않는다.

강지원 이슈365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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