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의 정치화 그리고 대법원장 잔혹사

입력
2023.08.18 18:0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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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의원 판결 판사 정치적 편향성 논란
대법원 차원의 진상 파악 돌입한 사법부
전·현직 대법원장 자초한 사법의 정치화 극복해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서울 서초구 서울법원종합청사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서초구 서울법원종합청사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판사 신상이 또 털렸다. 이번에는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박병곤 판사다. 박 판사 재판의 피고인은 여당 중진 정진석 의원. 노무현 전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정 의원에게 박 판사는 징역 6개월을 선고했다. 다른 명예훼손 사건과 비교해 형량이 높다는 판단, 그리고 학창 시절부터 임용 이후까지 박 판사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 나타난 정치적 편향성을 국민의힘은 문제 삼았다.

기시감이 든다. 4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2019년 1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 성창호 부장판사 신상이 털렸다. 피고인은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로 꼽히던 김경수 전 경남지사. 드루킹 댓글조작 공모 혐의로 김 전 지사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하자, 벌 떼같이 들고일어나 성 판사를 비난한 게 지금 국민의힘을 비판하는 민주당이다. 당시 민주당은 성 판사의 양승태 전 대법원장 비서실 근무 경력을 의심했다.

데칼코마니 같은 판사 신상 털기가 일상이 된 대한민국이다. 특히 유력 정치인이 걸린 재판마다 기승이다. 그때마다 법원은 사법부 독립을 앞세워 법관 보호에 나선다. 박 판사 건이 터지자, 서울중앙지법은 "SNS 일부 활동만으로 법관의 정치적 성향을 단정 짓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유감의 입장문을 냈다. 하지만 박 판사가 임관 이후 추가로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내는 글을 썼던 사실이 나오자, 결국 대법원 차원의 진상 파악에 들어갔다.

삼권분립이 보장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법부 독립은 당위다. 사법부 독립을 수호해야 할 판사 출신 국회의원들이 되레 공격에 앞장서거나 입을 닫는 비겁함으로 일관하는 게 정치권의 현실이다. 사법부 독립성 훼손에 정치권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지만, 빈틈이 없으면 절대 파고들지 않는 게 정치인들이다. 공교롭게 판사 신상 털기가 일상이 된 지난 10년간 사법부 수장들은 오욕의 한 페이지를 나란히 장식했다. 사법농단으로 헌정사 첫 구속이라는 불명예를 안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법농단의 핵심은 정권과의 재판 거래였다. 그런 사법부를 개혁하겠다고 문재인 전 대통령이 내세운 김명수 대법원장은 정치권 눈치를 보다가 거짓말까지 한 사실이 드러났다. 후배 법관들로부터 탄핵까지 요구받았지만 꿋꿋하게 임기를 채우고 있다.

사법의 정치화를 자초한 두 대법원장 임기 12년간 사법부 권위는 내ㆍ외부적으로 바닥을 쳤다. 정치적 중립을 규정한 법관윤리강령이나 SNS상에서 자기 절제와 균형적 사고를 요구한 대법원 권고는 “재판이 곧 정치라고 말해도 좋은 측면이 있다”는 발언으로 무시되는 게 법원의 현재 모습이다. 판결문에서 “정 의원 글은 우리 사회 전체 구성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을 넘었다”고 얘기한 박 판사지만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가 공적 인물이었다고 볼 수 없다”라는 판결에 동의할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법관도 정치적 소신을 가질 수 있지만, 판결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사법 불신의 단면이 된 판사 신상 털기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 임기는 다음 달까지다. 임명권자인 윤석열 대통령은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구속시켰다. 사법의 정치화가 초래하는 폐단을 누구보다 잘 아는 법조인 출신 대통령이다. 따라서 새 대법원장 임명에 신중해야 한다. 법치의 근간이 흔들리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 몫으로 돌아온다. 신임 대법원장은 뼈를 깎는 심정으로 12년간 정치권에 유린된 사법부 독립에 사활을 걸고, 대법원장 잔혹사도 끊어내야 한다.

김성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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