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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백년 방안갓, 빨간 굴뚝 목욕탕...익숙해서 소중한 추억 깃든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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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앞 의자 앉아 부채질로 더위를 식히는 어르신들. 두 사람이 마주 지나기 어려운 좁은 골목과 가파른 계단.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넝쿨과 그 아래 놓인 작은 화분들. 빨갛고 파란 기와 사이로 보이는 회색 슬레이트 지붕. 초록색 방수 페인트를 칠한 옥상, 그 위에서 말라가는 고추들. 간판 없는 가게와 목욕탕 굴뚝.
인천 미추홀구 복판의 수봉산 자락에서 볼 수 있는, 조각 풍경들이다. 수봉산은 숭의4동과 용현1·4동, 도화1동, 주안2동에 걸쳐 있는 수봉산은 해발 104m 나지막한 산. 그 아래 비탈진 땅에 키가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피란민들이 흘러 들어오고 일자리를 찾아 몰려온 노동자들이 정착하면서 만들어진 마을에는 옛것과 새것이 공존한다. 사람과 화물이 오가는 인천항과 경인고속도로, 수도권 전철 1호선이 가까워 많은 것들이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주안역에서 남인천역까지 주한미군 화물을 실어나른 주인선, 80·90년대 인천에서 유년기를 보낸 이들에겐 '롯데월드'와 '에버랜드'가 부럽지 않았던 수봉놀이동산, 인천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인 AID아파트는 이제 흔적만 남았다.
1972년 문을 연 제물포시장과 붉은 벽돌에 흰색 목욕탕 표시가 선명한 옛 양지탕 굴뚝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제물포시장의 이름 없는 두부 가게, 반백년 역사의 방앗간, 쉬어 가라고 빨간색 의자를 내논 의상실, 대를 이어온 문구점 등은 아직도 현역이다.
미추홀구와 창작자들을 위한 공간인 '창작실험실 수봉정류장', 지역 예술가들은 지난해 이같은 흔적과 장소, 공간, 사람을 하나로 엮는 작업을 벌였다. 걷고 싶은 길 '수봉산 둘레 마실길'을 만든 것이다. 숭의4동과 용현1·4동의 얘기가 담겨 있는 자료집과 지도를 펴내고, 길 곳곳에 이정표도 설치했다. 수봉정류장 측은 "곁에 있었지만 눈여겨보지 않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보석 같은 마을의 인적·물적 자원을 만나보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수봉산 둘레 마실길은 3권역으로 구성됐다. 1권역은 숭의4동 마실길로, 주인공원부터 수봉영산마을까지 4.6㎞ 구간이다. 다 걷는 데 3시간 정도 걸린다. 1호선 제물포역 1번 출구를 나와 차도를 하나 건너면 숭의4동 마실길이 시작되는 주인공원이다.
주인공원은 주인선 폐선 구간에 1997년부터 2005년까지 단계적으로 조성됐다. 주안역과 지금의 수인선 숭의역 인근에 있던 남인천역을 연결한 길이 3.8㎞의 주인선은 1985년까지 미군 화물을 실어 날랐다. 인천의 징병 대상자들을 논산훈련소까지 나르는기도 했다. 1994년 공식 폐선됐지만, 교량과 침목을 활용해 만든 길 등 그 흔적은 공원에 남아있다.
주인공원에 들어서면 특이한 구조의 2층집을 만나다. 소설 '톰 소여의 모험'에 나오는 오두막처럼 보인다고 해서 '톰 소여의 오두막'이라고 불린다. 과거 자동차 정비 공장이었으나 지금은 가정집으로 쓰인다.
주인공원과 주택가 경계가 되는 담벼락에는 달리는 증기기관차 등 벽화가 그려져 있다. 폐선 구간에 조성돼 좁고 긴 형태의 주인공원에는 야외 갤러리가 있어 그림도 감상할 수 있다.
주인공원을 벗어나 걷다 보면 카페와 넝쿨로 덮여 있는 편의점이 나온다. 이 곳을 지나면 넓은 공터를 살구색 'ㅁ'자형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제물포시장이 나온다. 제물포시장은 한때 점포가 120여개에 이를 정도로 호황을 누렸지만 1990대를 들어 쇠락했다. 2003년 재개발 사업시행인가를 받았으나 좌절됐다. 현재는 두부가게, 방앗간 등이 있는 일부분을 제외하고 폐허가 된 채 방치되고 있다. 특유의 분위기로 영화 '신세계', '써니' 등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배경이 됐다.
제물포시장에서 조금 더 걸으면 빛 바랜 간판의 의상실과 '남녀 6,000원, 소인 4,000원'이라고 적힌 요금표가 적힌 목욕탕을 만날 수 있다. 빨간 벽돌 굴뚝이 솟아있는 이 목욕탕은 제물포시장보다 한해 앞선 1971년 개업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다.
목욕탕을 지나면 어르신들의 '아지트'인 작은 슈퍼와 지누골 정자쉼터가 나온다. 어르신들은 이곳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더위를 피한다. '지누골'은 진흙골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은 한국전쟁 이후 복구가 늦어져 장화가 없으면 다닐 수 없는 진흙밭이었다.
정자쉼터 옆부터는 언덕길로, 포장된 길을 조금 오르면 형형색색의 타일이 붙어있는 계단이 나온다. 타일 계단을 오르면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수봉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면 수봉공원 무장애길 입구가 보인다. 계단이 없는 낮은 경사로를 걸으며 삼림욕을 할 수 있는 무장애길 옆에는 유아숲 체험원도 마련돼 있다.
무장애길 입구에서 큰 길을 따라 수봉산 정상에 오르면 돈까스로 유명한 기사식당이 있다. 평상에서 막걸리를 마실 수 있는 식당 겸 주점을 거쳐 발걸음을 옮기면 스티로폼 조각에 손글씨로 가게 이름을 적은 간판이 인상적인 수봉슈퍼가 나온다. 가게를 29년째 운영하고 있다는 주인은 "수봉공원 야간경관 개선사업 이후 장사가 잘 되다가 사회적 거리두기가 4단계로 올라가 다시 손님 발길이 끊겼다"고 했다.
수봉슈퍼에서 아기자기한 벽화가 있는 용정초등학교와 수봉산 숲길을 지나면 수봉정류장에서 숭의4동 마실길은 끝이 난다. 2019년 문을 연 수봉정류장은 창작공간이자 무인가게, 책방, 주민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2권역은 용현1·4동 아리마을 일대로, 총 길이는 2.3㎞이다. 걸어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용현1·4동 마실길은 골목에서 시작해 골목에서 끝이 난다. 시작은 수봉산 정상 기사식당이다.
기사식당 옆 골목으로 접어들면 작은 쉼터를 거쳐 아리마을 벽화골목이 나온다. 아치형 입구로 들어서면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 포스터와 '전보·취급소' 간판 등을 그림으로 옮긴 복고풍 벽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곳곳에 알록달록 벽화와 어울리는 화분이 놓여 있는 좁고 긴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TV 소리, 말 소리 등 사람 소리가 철제 대문 너머로 들린다. 우산 하나가 지나기 벅찬 좁은 골목에 사는 주민은 대부분 실향민이다. 고향에 언제 갈 수 있을까, 마음이 아리고 쓰리다 해서 '아리마을'이 됐다고 한다.
골목을 따라 내려오면 그림 액자가 벽에 걸려 있는 또 다른 골목이 나온다. 영화 세트장 느낌이 나는 이용원, 주민들의 휴식공간이자 물품 공유 공간 등으로 쓰이는 아리마을 사랑방 등이 모여 있는 골목이다. 건물들 사이로 3년 전 문을 닫은 양지탕 굴뚝도 보인다. 양지탕 건물은 리모델링을 통해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예정이다.
양지탕과 멀지 않은 곳에 주민들이 직접 가꾼 꽃길 골목이 있다. 옆에는 벽화마을도 있는데, 국내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날개 모양을 비롯해 나비 등이 그려져 있다. 벽화마을 인근 조용한 골목길에는 인천 역사 관련 책과 작품들을 볼 수 있는 행복한 골목학교와 한평 갤러리가 있다.
골목학교를 지나 다시 골목으로 들어서면 봄을 상징하는 벚꽃과 시원한 여름 계곡, 울긋불긋한 단풍이 담벼락과 바닥에 그려져 있는 계절 벽화가 반긴다. 용현1·4동 마실길은 골목 특성상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갈 수 있어 끝이라고 할만한 곳이 없다. 출발지인 기사식당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중간에 골목을 벗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 사람 향기가 있다.
미추홀구 관계자는 "3권역인 주안2동과 도화1동에 대한 자원 조사와 콘텐츠 발굴, 자료 수집을 추진하고 있다"며 "올해 연말쯤 3권역 자료집과 지도가 나오면 수봉산 둘레 마실길이 완성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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