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이 부른 싱가포르의 비극… 코로나 방역모범에서 동남아 최대 감염국으로

입력
2020.04.19 17:08
수정
2020.04.20 21:07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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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집단 격리돼 있는 기숙사 전경. 스트레이츠타임스 캡처
싱가포르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집단 격리돼 있는 기숙사 전경. 스트레이츠타임스 캡처

한때 ‘방역 모범’이라 불리던 싱가포르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급속 확산에 맥을 못 추고 있다. 환자 수는 6,000명에 육박하며 조만간 동남아시아 최대 발병 국가에 오를 기세다. 싱가포르 정부는 방역 타깃을 정확히 알고 있어 관리 가능하다는 입장이지만 근본 원인은 뿌리깊은 차별에 있다는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다.

19일 스트레이츠타임스 등에 따르면 전날 싱가포르의 코로나19 확진 환자는 일일 발병 기준으로는 최다인 924명이 추가돼 5,992명이었다. 서울보다 조금 큰 넓이(719㎢)의 도시국가 싱가포르 인구가 561만명(2017년 기준)인 걸 감안하면, 인구 1,000명당 1명 이상이 코로나19에 감염됐다는 얘기다. 동남아에선 인도네시아(6,248명) 필리핀(6,087명)에 이어 발병 3위를 기록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코로나19 환자가 3,000명에서 두 배가 되는데 닷새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기간 매일 평균 600명 넘게 신규 환자가 발생한 것으로 현재 동남아 최대 발병 국가인 인도네시아의 환자 증가 추세(하루 평균 300명선)를 뛰어넘는다. 석 달 넘게 코로나19 환자 수를 1,000명 아래로 유지하며 대만 홍콩 등과 더불어 ‘방역 모범’이라 불리던 싱가포르가 ‘동남아 최대 감염국가’ 오명을 얻을 위기에 처한 셈이다.

외국에서 돌아온 자국민들을 2주간 격리시키는 전용시설로 쓰이고 있는 싱가포르 센토사섬의 ‘샹그릴라 라사 센토사 리조트&스파’ 전경. 리조트 홈페이지 캡처
외국에서 돌아온 자국민들을 2주간 격리시키는 전용시설로 쓰이고 있는 싱가포르 센토사섬의 ‘샹그릴라 라사 센토사 리조트&스파’ 전경. 리조트 홈페이지 캡처

싱가포르 정부는 “최근 확진 환자 대부분이 외국인 노동자들이며 전체 확진 환자의 60% 이상을 차지한다”고 발표했다. 리셴룽 총리는 “당분간은 더 많은 외국인 노동자 감염 사례가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감염 경로와 상황을 알고 있으니 관리가 가능하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그러나 현지 언론과 시민단체들은 싱가포르 정부의 초동 대처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주거 환경과 위생 실태는 고려하지 않은 채 이들이 묵고 있던 기숙사에 집단 격리시키면서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애초 한 쇼핑몰에 갔다가 감염된 것으로 보이는 외국인 노동자가 기숙사에 함께 사는 동료들을 다시 감염시키면서 기숙사 내 연쇄 감염으로 이어졌다.

싱가포르에는 미얀마 인도 스리랑카 등에서 온 20만명 이상의 외국인 노동자가 43개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현재 기숙사 18곳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해 8곳이 격리 지역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10여명이 함께 묵는 좁은 방, 비누와 세제도 없어 샤워와 청소는 사치로 여겨지는 공동 시설이 오히려 집단 감염을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다. 한 외국인 노동자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한 방에 12명이 사는데 어떻게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가능하냐”고 되물은 뒤 “부엌은 물론 방에도 바퀴벌레가 많고, 화장실 소변기는 소변으로 넘친다”고 말했다.

외국에서 돌아온 싱가포르 국민들이 2주 자가 격리를 위해 정부가 지정해 준 호텔에 투숙하고 있다. 스트레이츠타임스 캡처
외국에서 돌아온 싱가포르 국민들이 2주 자가 격리를 위해 정부가 지정해 준 호텔에 투숙하고 있다. 스트레이츠타임스 캡처

실제 외부와 봉쇄된 격리 기숙사에선 매일 코로나19 환자가 추가되고 있다. 싱가포르 한 의사는 이번 사태를 ‘일본에 정박한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 빗대며 “솔직히 어려운 상황으로 엄청난 혼란이 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국제엠네스티 싱가포르 지부는 “적절한 위생 시설과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가능한 공간을 마련하지 않고 수천 명을 극도로 밀집된 공간에 격리하는 것은 재앙을 가져오는 처방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부른 비극’이라는 자성도 나왔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기숙사에 한꺼번에 격리시킨 조치는, 해외에서 돌아온 자국민에게 룸 서비스와 바다 전망이 있는 5성급 호텔을 14일간 자가 격리 공간으로 내준 국가적 배려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뒤늦게 군부대, 전시장, 크루즈선 등을 외국인 노동자들의 분산 수용 시설로 지정하고 있다. 증상이 있거나 확진 판정을 받은 노동자는 기숙사 시설에 남겨 치료하되 건강한 노동자들은 정부가 지정한 공간에 따로 수용하는 방식이다. 외국인 노동자 감염 대응 태스크포스(TF)도 꾸렸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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