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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지토 미히고 (1981.7.25~2020.2.17) 
키지토 미히고는 프랑스음악원에서 기악과 클래식 작곡을 전공한 르완다 국민가수다.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 학살로 아버지와 조모를 잃고 그 역시 구사일생 살아남았지만, 그는 자기 부족인 투치족이 집권 이후 자행한 후투족에 대한 보복 살인과 차별에 반대하며, 직접 짓고 노래한 500여 곡의 가스펠 풍 노래로 부족간 용서와 화해, 평화와 공존을 줄기차게 호소했다. 특정 부족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생명과 존엄이 신앙의 근본이자 노래의 힘이라 믿었던 그는 현 투치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 의문사했다. 그의 페이스북 사진.

키지토 미히고(Kizito Mihigo)는 르완다 국민가수다. 르완다 국가(國歌) 작곡 경연대회에서 입상했고, 국비 유학생으로 벨기에와 프랑스 파리음악원(Conservatoire de Paris)에서 기악(오르간)과 작곡을 공부했다. 그는 유럽의 클래식 음악가로 사는 대신 모국어로 노래하는 르완다 대중가수가 됐다. 엄밀히 말하면 대다수 가톨릭 신자인 국민들을 위한 성가(聖歌)를 지어 부르는 특이한 가수였다. 다만 그의 성가는 신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라 신적인 가치, 생명과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하는 성가였다. 그는 자신처럼 내전-학살을 겪고 살아남은 이들을 위로하고자 했고, 반목과 유혈의 역사가 거듭되지 않도록 계몽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모두가 함께 듣고 따라 부르는 대중의 노래, 국민의 노래였다. 그는 “음악이 르완다 사회를 재건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라 믿으며 “인기나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나라와 신의 뜻을 좇는 이들을 위해” 노래했다. 무대에서든 뮤직비디오에서든 항상 정장 슈트를 입고 설교하듯 노래하는 그를 르완다 인들은 귀하게 여겼고, 2013년 르완다 남성 연예ㆍ스포츠 스타 인기 투표에서 ‘최고 섹시남(hottest male celebrity)’ 2위로 꼽기도 했다.

만 38세의 미히고가 2월 17일, 르완다 수도 키갈리의 레메라(Remera) 경찰서 유치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나흘 전 경찰은 그가 “신분을 감추고 남쪽 국경을 넘어 부룬디로 도피하려다 체포”됐다고 밝혔다. 당국은 그의 사인을 자살로 공식 발표했다. 그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는 르완다 국민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국제사회는, 르완다 인권 현실을 주목해온 수많은 국제인권단체들은 애도에 앞서 일제히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그리고 그의 석연찮은 죽음은 르완다 내전과 미히고의 짧고 비범한 생애를, 내전 이후 경제 성장의 성과에 감추어진 르완다 정치ㆍ사회의 이면과 인권 현실을 들추어보게 했다.

1919년 르완다 식민통치를 시작한 벨기에는 국민의 약 15%인 투치족을 앞세워 85%의 후투족을 지배했다. 두 부족은 외모부터 현저히 달라, 소와 양을 기르는 투치족은 키가 크고 갸름한 얼굴에 상대적으로 덜 검은 피부를 지닌 반면 후투족은 전형적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의 외모로 주로 농사를 지었다. 두 부족의 권력구도는 1962년 르완다 독립을 전후해 뒤집어졌다. 권력을 장악한 절대 다수의 후투족은 백인들보다 대리인의 우월적 지위로 자신들을 깔보던 투치족을 더 증오했고, 권력을 두고 다투던 1959년 투치족에 대한 집단 테러를 자행했다. ‘1차 르완다학살’이었다.

그 와중에 투치족, 특히 상층부 권력층 다수는 이웃 우간다나 콩고로 피신했다. 그들은 귀국을, 옛 권력의 수복과 복수를 원했고, 무장 반군 조직 르완다 애국전선(RPF)을 구축해 1990년 10월부터 후투족 정부군과 전투(르완다 내전)를 벌였다. 양측은 각 5,000여 명의 전사자를 낸 뒤, 유엔 중재 하에 투치족 귀국과 권력 분배를 조건으로 93년 8월 휴전했다. 후투족 강경파는 그 휴전, 권력 배분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들은 사실상 정부 지원을 받는 비정규군 후투족 학살조직 ‘인테라함웨(Interahamwe, 함께 싸우는 이들)’를 조직했다.

1994년 4월 6일, 후투족 대통령 쥐베날 하브자리마나가 비행기 격추로 암살 당했다. 이후 약 100일 동안 인테라함웨는 투치족과 후투족 온건파 약 80만~100 만명을 학살했다. 저 악명높은 ‘르완다 학살’이었다. 학살 10년 뒤 르완다를 취재한 저널리스트 겸 작가 앤드루 솔로몬은 ‘경험수집가의 여행’(김명남 옮김, 열린책들)에 수록한 ‘나쁜 기억의 아이들’이란 에세이에 “그들에게 투치족은 인간이 아닌 적일 뿐”이었고, “정확하게는 ‘바퀴벌레’”였다고,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에서는 살해가 임상적이고, 체계적이고, 원격적이었던데 반해 르완다 대량 학살은 직접 손을 쓴 일이었다. 인테라함웨뿐 아니라 농부들도, 주로 농기구로, 사람을 죽였다”고 썼다.

동족 보호를 명분으로 다시 전투를 재개한 투치 반군 RPF는 7월 15일 수도 키갈리를 점령, 30여 년 만에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투치족 학살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대통령이 된 RPF 지도자 폴 카가메 체제는 후투족 최소 2만여 명을 보복 살해했다. 후투족은 학살의 죄인 혹은 ‘노예 부족’의 처지로 전락해, 상시적인 위협과 멸시와 차별을 견뎌야 했다.

키지토 미히고는 저 학살의 생존자였다. 그는 1981년 7월 25일, 르완다 남부 기콩고로(Gikongoro) 주의 오래된 종교도시 키베호(Kibeho)에서 태어났다. 신학대학을 나온 아버지는 키베호 초등학교 교장이었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그들은 장남 미히고에게 우간다 첫 성자의 이름 ‘키지토’를 주고, 성직자가 되라고 가르쳤다.

르완다 수도 키갈리 외곽의 학살 추모기념관 전시품 중 하나. 투치족 정부가 추념하는 학살은 후투족에 의한 투치 학살일 뿐, 투치족의 후투족 보복 살인은 정의의 심판일 뿐이었다. 저널리스트 엔드루 솔로몬은 "전시장에 적힌 학살 사망자 수는 폴 카가메 대통령이 투치족 중심적으로 집계한 수와 일치했는데, 그 수치는 여러 국제 사회 목격자의 수치와는 크게 다르다"고 책에 썼다. wikipedia.org

50년대 말 학살 때도 그의 고향 키베호의 투치족은 거의 무사했다.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가 ‘이웃’을 보호한 덕이었다. 독립 후 키베호는 투치족의 피난처처럼 통했고, 내전 때도 남부 키베호 주민들은 북부 전선 소식에 거의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1994년 키베호 주민 99%가 투치족이었다. 하지만 그 해 4월 르완다 학살이 본격화하던 무렵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누려온 권력과 권리를 다시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감과 인테라함웨의 광기가 부족 증오심을 증폭시켰다. 한 교회를 다니던 후투족 신도들이, 한 학교의 급우들이, 투치 이웃들을 살해하고 재산을 강탈했다. 2007년 에세이에 미히고는 12세의 자신이 죽을 고비를 어떻게 넘겨 살아남았는지, 피난 도중 어머니와 누이들과 어떻게 헤어져 부룬디 난민수용소에서 어떻게 재회했는지, 노모와 함께 고향에 남은 아버지가 누구 손에 어떻게 살해당했는지, 당시 자신이 얼마나 세찬 증오와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썼다. “확신하건대 나도 그들을 죽일 수 있었다. 나도 RPF 군대에 입대해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얼마 뒤 다시 문 연 학교에서 그는 후투족 아이를 때린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alterinfo.net)

9살 무렵부터 성가 작곡 흉내를 냈다는 그는 95년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예비 신학교(Petit Seminaire de Butare)에 진학했다. 그를 위로한 것도 음악(과 가라데)이었다. 그는 신학교 첫 해에 50여 곡을 작곡했고, 2학년때 성가대를 조직해 직접 오르간을 연주하며 그들과 함께 연습에 몰두했다. 성가대원이던 키베호 출신 후투족 2명은 학살 가담자의 아이들, 다시 말해 원수의 자녀들이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성가를 연습하며 용서를 배웠다고 훗날 고백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그는 무려 380여 곡을 작곡했고, 2001년 국가(國歌) 공모전 우승 등 여러 작곡 경연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그의 노래는 이미 교회를 중심으로 르완다 전역에서 불렸다. 그는 2003년 대통령 장학금을 받아 벨기에와 파리음악원으로 유학, 오르간과 작곡을 전공했고,(independent.co.ug) 학위를 받은 뒤 벨기에에 정착해 약 3년간 고교 음악교사로 일하며 작곡과 연주회를 병행했다. 현지 평화운동 단체와 아프리카인 가톨릭공동체 등의 도움을 받아 2007년 브뤼셀에서 ‘아프리카 평화를 위한 미사’를 개최했고, 유럽 순회 공연을 다니며 성가곡과 진혼곡을 주로 연주했다. 청중 다수는 독일과 프랑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등지에 흩어져 살던 르완다 등 아프리카 난민이었다. 그는 헨델과 바흐, 모차르트를 좋아했다. 2009년 한 인터뷰에서, 클래식 작곡을 전공하고도 성가곡만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음악 장르를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엄청나게 좋아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rwandaises.com)

그는 2010년 ‘키지토 미히고 평화재단(KMP)’을 설립했고 이듬해 르완다로 영구 귀국, 정부와 월드비전, 주 르완다미국대사관 등의 후원을 받아 학살 피해가 극심했던 지역의 학교와 교도소를 돌며 ‘화해와 평화’를 위한 노래와 연주회를 이어갔다. 재단 활동에는 화가와 시인 다수도 동참했다. 2011년 영부인 저넷 카가메(Jeannette Kagame)의 ‘임부토 재단(Imbuto Foundation)’은 그에게 ‘청년르완다인 상’을 수여했다. 2012년 4월 ‘르완다학살 기념일’에 맞춰 발표한 그의 추모곡 ‘TWANZE GUTOBERWA AMATEKA(Never We Will Allow)’은 그의 대표곡이자 르완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 중 하나다. 장중하고 서정적인 가락에 그는 학살의 기억을 간직하되, 그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하자고, 화합하자고 호소하는 노랫말을 얹었다. 그 노래를 누구보다 반긴 이가 아마도 폴 카가메 대통령이었을 것이다.

내전 직전인 1990년 IMF 구제금융을 받고, 내전 기간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했던 르완다 경제는, 카가메 정부 출범 후 정치 안정을 기반으로 연평균 7%(2019년 8.5%) 성장했다. 1인 국민소득(GDP)도 94년 146달러에서 2018년 787달러로 늘었다. ‘아프리카의 싱가포르’를 표방하며 2000년 경제개발 20년 장기계획을 발표한 카가메 정부는 국제 원조와 대규모 외자 유치 등을 통해 농업 외 제조업과 관광서비스업을 집중 육성했다. 2017년 르완다 국가부패지수(CPI)는 세이셸, 보츠나와 다음으로 낮았다. 2019년 세계은행은 르완다를 기업하기 좋은 국가 세계 29위로 꼽았다.(trtworld.com) 학살 후유증으로 총인구의 53%가 19세 미만이고, 그들이 노동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면 실업률(2019년 16.7%) 등 인구 압력이 거세질 것이라는 우려들이 있지만, 르완다가 원조 자금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한 아프리카 국가 중 한 곳이란 사실에 토를 다는 이는 없다.

내전 승리를 이끌며 2000년 집권한 폴 카가메 대통령은 르완다 경제를 비약적으로 성장시켰다는 찬사와 더불어 정적 살해와 탄압, 후투족에 대한 국가적 차별과 억압을 자행해온 권위주의 독재자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국제인권단체는 헌법까지 고쳐 사실상 종신 집권의 길을 연 그가 '권력을 위해 '학살의 역사'를 악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진은 대중 연설 중인 폴 카가메 대통령. 로이터 연합뉴스.

반면에 카가메 정부의 정치ㆍ사회 민주화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 2003년과 2010년 각각 95%와 93% 지지율로 임기 7년의 공식 대통령 직을 연임한 그는 헌법을 바꿔 자신에게 두 차례 더 대권 도전의 기회를 부여했고, 2017년 대선에서 98%를 득표했다. 그 과정에서 두 명의 야권 대권 주자를 포함한 야당 지도자들은 ‘내란’ 등 혐의로 투옥과 가택연금을 당했고, 언론 탄압과 반정부 인사들의 실종ㆍ사망 및 망명 사태가 빈발했다. 르완다 정부의 협조 거부로 2000년 대 중반 이후 국제사면위원회 등의 인권 조사 활동도 중단됐다.(hrw.org) RPF 동지였다가 카가메와 척을 진 뒤 망명한 반정부인사 패트릭 카레게야(Patrick Karegeya)가 2014년 1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한 호텔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그 직후, 카가메는 대중 연설을 통해 “반(反)르완다 음모를 꾸미는 이는 누구든, 어디에 있든,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다”라고 말했다(hrw.org) 한국의 70년대 군사독재정권이 반공이데올로기를 악용했듯이, 카가메가 학살 이데올로기를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한다고, 국제인권단체들은 비판해왔다. 르완다가 한국과 다른 점은, 그들의 ‘적(후투족)’은 국경이나 전선 너머가 아니라 담장 너머에서 함께 살아갈 이들이라는 거였다.

카가메 정부는 2014년 초 국가적 차원의 캠페인 ‘나는 르완다인이다(I Am Rwandan)’ 을 시작했다. 국민이란 정체성으로 뭉쳐 학살 후유증을 치유하고 부족 갈등을 극복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그 캠페인은, 야당 및 인권단체들에 따르면, 후투에 의한 투치 학살을 끊임없이 부각하며 학살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사실상 투치 권력 캠페인이었다. 캠페인을 통해 후투족은 끊임없이 존재를 부정당하고, 스스로를 부정해야 했다.

캠페인 직후, 그러니까 2014년 학살 기념일 직전인 그해 3월 미히고는 진혼곡 풍의 학살 추모곡 ‘Igisobanuro Cy'urupfu(The Meaning of the Death)’을 유튜브에 발표했다. 노랫말에 그는 “제노사이드든, 전쟁이든, 보복의 학살이든, 사고로 죽든, 병들어 죽든, 우리는 모든 죽음을 애도해야 하며(…) 나의 존엄과 사랑은 육체적 삶과 부(富)가 아니라 오직 인간이라는 존재적 가치 위에서 평가된다”고, “I am Rwandan(NdiUmunyarwanda)’보다 ‘I am Human”이 더 중요하다”고 노래했다. 카가메 권력에 대한 노골적인 반격이었다.

미히고는 그 해 4월 7일 키갈리 아마호로(Amahoro) 스타디움에서 열린 20주년 학살 기념 공연 무대에 서지 못했다. 그는 4월 4일 경찰에 연행됐다. 치안당국은 4월 12일 미히고를 ‘내란 선동 및 대통령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해외 반(反) 카가메 투치족 기구인 르완다국민회의(RNC)및 후투족 무장단체 르완다해방민주군(FDLR) 관계자와 스카이프 등으로 대화를 나눈 게 확인된 그의 혐의였다. 미히고는 만일의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반정부기구 지도자들의 의도를 알고자 한 게 전부라고 변호인단을 통해 호소했지만, 소용 없었다. 재판 막바지에 그는 자신의 변호인들을 모두 물린 뒤 스스로 유죄를 인정, 2015년 2월 사형과 종신형 대신 10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유럽의회를 비롯한 국제사회 및 인권단체들은 카가메 권력의 인권 및 언론 탄압과 미히고에 대한 고문 의혹, 재판의 불공정성을 성토하며 그의 석방을 촉구했다. 앞서 카가메는 미히고가 연행된 직후인 2014년 3월 경찰간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나는 우리 나라를 증오하는 이들에게 비위를 맞추는 기자나 가수와 다르다.(…) 내 책임은 이 나라의 안보를 유지하는 것이다. 르완다를 흔들려는 자는 누구든, 응분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키갈리 중앙교도소에 수감된 미히고는, 함께 수감생활을 했다가 출소한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민족 증오와 복수심에 사로잡힌 재소자들과 줄기차게 대화하며 화합을 호소했다고 한다. 4년여 뒤인 2018년 9월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그는, 키갈리에 음악학교를 세워 초ㆍ중등 학생들에게 작곡과 기악을 가르쳤다. 그의 조국은 그에게 더 이상 작곡가나 가수로서의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석방 18개월여 뒤 망명을 시도하다 체포됐고, 나흘 만에 숨졌다.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노래했던 그가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는지, 그게 정말 그의 선택이었는지, 세상은 긴 세월이 흐른 뒤에야 온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흔적들은, 르완다 안에서는, 앞서 폐쇄된 그의 홈페이지처럼 빠르게 지워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여전히, 국경과 부족의 경계를 넘어 많은 이들이 듣고 따라 부는 노래로, 유언처럼 남았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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