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애국적 광기’에 대하여(3.23)

입력
2020.03.23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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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한 일간지의 장인환 전명운의 스티븐스 살해사건 보도.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자료.
미국 한 일간지의 장인환 전명운의 스티븐스 살해사건 보도.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자료.

2001년 9ㆍ11 테러와 이후 일련의 반작용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애국적 광기(patriotic Insanity)’란 말이 눈에 띄곤 한다.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리즘의 비이성적 신앙과 더불어 미국 사회에 만연한 반이슬람ㆍ반이민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맥락에서다. 한 저널리스트는 “나는 애국자지만, 내게 그 말은 내 나라가 내가 기대하는 바에 미치지 못할 때 따져 물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의미이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변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미이다”라고 썼다.

‘애국적 광기’란 말은, 대한제국 시절의 미국 국적 독립운동가 장인환(1876~1930)과 전명운(1884~1947)의 더럼 W. 스티븐스(Durham W. Stevens, 1851~1908) 저격사건 재판 변론 요지로 먼저 알려졌다.

스티븐스를 숨지게 한 총격의 실질적 주역인 장인환의 변론을 맡은 변호사 네이선 코플런(Nathan Coughlan)은 독립운동의 명분과 스티븐스의 제국주의 부역 정황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던지, ‘피고가 일종의 정신질환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이므로 범죄요건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변론했다. 당시는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통치하던 시절이었고, 스티븐스는 미 국무부 외교관 출신 일본 외교고문으로서 미국 동아시아 외교의 중요한 채널 중 하나였다.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여객선 선착장에서, 일본인 총영사와 함께 있던 스티븐스와 몸싸움을 벌인 전명운은 장인환과의 공범관계가 입증되지 않아 무죄를 선고 받은 반면, 권총 세 발을 쏘아 스티븐스를 숨지게 한 장인환은 25년 금고형을 선고 받고 10년 만인 1919년 가석방됐다.

애국적 광기는 ‘표상과 의지’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1788~1860)의 만년의 에세이에 등장한다. 이성이 아닌 본능에 가까운 충동적 ‘의지’를 자연과 세계의 동력이라 여겼던, 그래서 근본적으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혐오와 회의를 사상의 바탕에 깔았던 그는 전 유럽 국가가 벌인 나폴레옹 전쟁(1803~1815)과 국가 단위의 민족주의ㆍ애국주의의 광기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는 “학자에게 애국심은 마땅히 던져버려야 할 더러운 존재”라고 했고, “국가적 자부심이야말로 가장 값싼 종류의 자부심이며, 누가 자기 나라의 자랑거리로 스스로 자랑스러워 한다면 그는 자신에게 자랑스러워 할 만한 자질이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그에게는 애국심 자체가 사실 일종의 광기였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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