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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사재기의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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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 주장한 ‘자기충족적 예언’이라는 개념이 있다. 어떤 상황에 대한 잘못된 예측을 믿고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면 그 예측이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머튼이 든 사례 중 하나는 건전한 은행이 지급 불능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뱅크런이 발생하는 경우다. 사이가 좋지 않은 두 나라에서 전쟁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군비가 확장되고 결국 우발적인 계기로 전쟁이 일어나고 마는 것도 비슷한 메커니즘이다. 이런 결과를 추동하는 결정적인 심리 기제는 ‘불안’과 ‘집단행동’이다.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확산되면서 각국에서 사재기 바람이 일고 있다. 마스크는 나라마다 동이 났고, 화장실 휴지 등 생필품 매진도 허다하다. 화장실 휴지 사태의 발전 과정은 대체로 이렇다. 휴지 구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돈다. 사실과 거리가 먼 이 소문을 절대 믿지 않는 사람과 금세 믿는 사람은 각각 10% 정도다. 문제는 이도 저도 아닌 80%. 휴지가 떨어질 것이라고 믿는 10%가 슈퍼마켓으로 달려가고 그 바람에 휑하니 빈 매대를 본 80%가 흐름을 놓치고 있다는 불안에 휩싸여 집단행동에 나선다.
□ 영국 심리학자 스튜어트 서덜랜드는 ‘비합리성의 심리학’에서 “두려움은 전염성이 강하다”면서도 “그러한 공포는 대부분 비합리적”이라고 말한다. 극장 같은 밀폐 공간에서 화재가 났을 때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다 더 큰 인명 피해를 보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권위적 존재”가 있으면 그런 공포는 줄어들 수 있다고 한다. 항공기 사고가 발생해도 공황 상태에 빠지는 승객이 적은 이유는 침착한 분위기를 만들려는 승무원의 유도에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공급 부족이 근본 원인이긴 하지만 마스크 사태에서도 이런 불안 심리가 일부 작용한다. 감염병 대처에 권위적 존재인 질병관리본부장은 마스크가 꼭 필요한 사람으로 3부류를 꼽는다. 발열ㆍ호흡기 증상자, 의료기관 방문자, 다중 밀집 장소에 가는 고령ㆍ기저질환자다. 물론 마스크는 일반인에게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물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기를 쓰고 구해 써야 할 필요까지 있을까 싶다. 일회용 마스크라도 필요할 때 잠깐씩 사용했다면 며칠 써도 무방할 테고, 정 없다면 부직포로 간이 마스크를 만들어 쓰는 것도 불안을 더는 방법이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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