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의 굿모닝 2020s] 포퓰리즘ㆍ페미니즘 근원은 불안… “차별 없는 사회 추구해야”

입력
2020.03.10 04:30

 <12> 정체성 

‘정체성 정치’의 기본 목표는 방어나 해방이다. 포퓰리즘이 방어(반세계화)를 모색한다면 여성운동은 해방(성평등)을 지향한다. 2018년 2월 청와대 분수대 광장에서 포괄적 성교육 권리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등 페미니즘 단체들이 초ㆍ중ㆍ고교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원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정체성 정치’의 기본 목표는 방어나 해방이다. 포퓰리즘이 방어(반세계화)를 모색한다면 여성운동은 해방(성평등)을 지향한다. 2018년 2월 청와대 분수대 광장에서 포괄적 성교육 권리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등 페미니즘 단체들이 초ㆍ중ㆍ고교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원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정체성(identity)’은 추상적인 말이다. 정체성이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응답하는 사유와 감정을 총칭한다. 다시 말해, 정체성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스스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추상적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체성은 오늘날 현대인과 현대사회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또는 단체인지를 인식하는가의 정체성에 기반하여 사고하고 행동하기 마련이다.

 ◇불안이라는 정체성의 실체 

이러한 정체성을 여기서 다루는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정체성은 개인 또는 집단의 고유한 특성이라기보다 사회적인 구성물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다른 이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나는 한국인이고, 여성이고, 노동자고, 환경주의자라는 정체성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정체성을 구성하는 이러한 요소들은 사회변동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

둘째, 이러한 정체성은 집합적 행동을 촉발한다. 같은 정체성을 공유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출하기를 원하거나 정체성이 위협 받는다고 생각할 때, 집합적 행동을 시도한다. 이 집합적 행동이 ‘정체성 정치’라 불린다. 정체성 정치에서 ‘정치’는 넓은 의미를 가진다. 여성운동과 같은 사회운동의 운동 정치에서 옴진리교 신도와 같은 소수자 그룹의 공동체 활동까지를 포괄한다.

정체성은 크게 개인적 차원의 자아정체성, 집단적 차원의 민족ㆍ계급ㆍ성정체성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21세기가 시작한지 20년이 지난 현재, 개인적 차원과 집단적 차원을 모두 고려할 때, 우리 인류의 정체성을 일차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불안의 정체성’이다.

이 불안의 정체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2008년 금융위기였다.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에서 포스트신자유주의로 가는 전환기의 불확실성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명명한 ‘유동하는 공포’를 유포시켰다. 삶의 위험을 어디서나 만나지만 그 정체를 제대로 알기 어렵고, 나아가 그 결과에 올바로 대응할 수 없다는 불안의 내면화와 구조화가 유동하는 공포의 핵심을 이뤄 왔다.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4년이 지난 2012년,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스, 물리학자 주앙 카라사, 언론학자 구스타보 카르도소는 경제위기가 가져온 사회ㆍ문화 변동을 ‘여파: 경제위기의 문화’에서 분석한 바 있다.

이들에 따르면, 금융위기 이후 사회적 저항은 빈발했고, 포퓰리즘이 분출했으며, 방어적 개인주의는 외국인 혐오와 인종주의를 부채질했다. 이 과정에서 두려움의 문화가 번져 나가는 동시에 새로움의 문화가 등장해 왔다. 불안이 지배하는 문화와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대안을 추구하는 문화가 혼돈스럽게 공존하는 게 금융위기 이후 사회ㆍ문화적 풍경을 이뤄온 셈이었다.


두려움과 새로움의 공존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은 개인의 자아정체성이다. 카스텔스가 명명한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는 이 자아정체성의 현주소를 적절히 보여준다.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는 개인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와 네트워크를 중시하는 ‘부족주의’의 공존을 강화시켰다.

예를 들어, 혼자만의 생활을 즐기는 개인주의가 증대하는 과정 속에 문화적 취향에서부터 사회적 혐오까지 이르는 부족주의가 동시에 번성해온 시대가 바로 2010년대였다. 과잉화된 연결 속에 자아는 정작 고독에 유폐되는 모순적 경향은 우리 시대 자아정체성의 사회ㆍ문화적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정체성 정치가 강화됐다. 정체성 정치는 실존적 자아에 사회적 존재로서의 의미를 부여했고, 유동하는 공포에 맞서 투쟁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했다. 지난 10년간 가장 주목할 두 정체성 정치는 포퓰리즘과 페미니즘이다. 어느 나라에서든 목격할 수 있는 포퓰리즘과 페미니즘의 분출은 강요된 세계화로 약화된 국가의 존재와 신보수적 가부장제로 훼손된 여성의 권리를 복구하고 확장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2020년대와 정체성의 미래 

2020년대에 정체성의 미래는 그렇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앞서 말했듯, 21세기에 들어온 후 지난 20년 동안 정체성은 낙관보다 비관으로 채색돼 있다. 비관의 근원은 사회 시스템의 통제 불가능성과 예측 불가능성이 안겨주는 일상화된 불안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까지 알고 있던 세계가 종언을 고하고 낯선 세계가 열리고 있는 것에 반해, 인류는 이 새로운 세계를 판독할 지도를 갖고 있지 못하다. 불안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개인적·집합적 행동은 강화되는 법이다.

국제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정체성: 존엄성의 요구와 분노의 정치학’에서 이러한 정체성과 정체성 정치가 최근 정치변동을 독해할 ‘마스터 개념’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종교, 인종, 민족, 그리고 젠더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들이 훼손되는 현실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정체성 정치가 기성 근대정치를 대체하고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분노와 존엄이 정체성의 개념으로 결합되는 시대를 인류는 살아가고 있다.

주목할 것은 불안이라는 현실의 벽이 너무 버거울 때 우리는 미래가 아닌 과거로 후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한 개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 취할 수 있는 전략으로 ‘방어, 해방, 퇴각’을 제시한 바 있다. 정체성 정치는 기본적으로 방어 또는 해방을 목표로 한 사회운동이다. 예를 들어, 포퓰리즘이 반세계화라는 방어를 모색하는 특성이 두드러진다면, 여성운동은 성평등이라는 해방을 지향하는 성격을 드러내보인다. 마지막 퇴각의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레트로토피아 경향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레트로’(복고)와 ‘유토피아’(낙원)를 합쳐 만든 말인 ‘레트로토피아’는 과거가 현재보다 더 나았다고 회고하는 현상이다. 1991년 데뷔한 가수 양준일의 소환도 미래에 대한 현대인의 비관적 전망이 낳은 이 현상의 일종이다. 지난달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는 양준일. 왕태석 선임기자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레트로’(복고)와 ‘유토피아’(낙원)를 합쳐 만든 말인 ‘레트로토피아’는 과거가 현재보다 더 나았다고 회고하는 현상이다. 1991년 데뷔한 가수 양준일의 소환도 미래에 대한 현대인의 비관적 전망이 낳은 이 현상의 일종이다. 지난달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는 양준일. 왕태석 선임기자

바우만은 ‘레트로토피아’에서 이러한 레트로토피아 경향을 분석한다. 유토피아가 미래를 향한 비전이라면, 레트로토피아는 과거에 대한 향수다. 좋았던 과거, 즉 안정성과 신뢰성을 갖고 있던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그 시절에로의 회귀가 레트로토피아의 중핵을 이룬다.

바우만에 따르면, 오늘날 관찰할 수 있는 레트로토피아는 네 가지 경향이 존재한다. 공공질서 유지에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의 회귀, 민족ㆍ인종ㆍ종교를 기반으로 한 부족주의로의 회귀, 신분이자 운명으로 개인을 구속하는 불평등으로의 회귀, 경쟁이 부재한 안전한 장소인 원초적 자궁으로의 회귀가 그것들이다. 이 레트로토피아에는 불안ㆍ절망ㆍ분노ㆍ공포의 심정이 뒤엉켜 있고, 이 복합적인 레트로토피아 정체성은 때로는 자기 세계의 일방적인 방어로, 때로는 타자와 사회에 대한 초연한 무관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2020년대 현재 정체성은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임을 주목할 때,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포퓰리즘, 혐오와 증오의 문화라는 2020년대의 사회적 풍경은 정체성과 정체성 정치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불안의 정체성에 대한 최선의 해법은 경제적 평등을 모색하고, 적대의 문화를 완화시키고, 사회적 차별을 해소하는 제도와 의식개혁에 있다. 부단한 대화와 혁신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분출하는 정체성들이 강제하는 원심력에 의해 공동체로서의 사회는 더욱 약화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사회와 정체성 

우리 사회에서 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다양하게 이뤄져 왔다. 민족 정체성, 종교 정체성, 문화 정체성은 대표적인 주제들이었다. 여기서 살펴보려는 것은 그런 고유한 정체성이 아니라 최근 사회변동에 따른 정체성의 변화다. 이제 서구사회와 한국사회 간의 사회구조적 차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여 나는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첫째, 불안의 정체성은 현재 우리 사회의 모든 세대를 관통한다. 20대의 청년실업, 30대의 구조조정, 40대의 퇴출의 공포, 50대 이후의 위기의 노후는 그 불안의 정체성이 놓인 현실을 상징한다. 둘째, 정체성 정치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그 가운데 민족주의에 기반한 반일문화의 확산과 성평등을 향한 페미니즘 운동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에 기반한 반일 문화 운동도 정체성 정치의 하나다. 2019년 10월 평화나비 네트워크와 대학생 겨레하나 등의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유니클로 매장 앞에서 ‘위안부 모독’ 의심 광고로 논란을 일으킨 유니클로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민족주의에 기반한 반일 문화 운동도 정체성 정치의 하나다. 2019년 10월 평화나비 네트워크와 대학생 겨레하나 등의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유니클로 매장 앞에서 ‘위안부 모독’ 의심 광고로 논란을 일으킨 유니클로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회학자 크레이그 칼훈이 강조하듯, 정체성은 개인에게 존재의 의미를 제공한다. 그 존재가 불안에 시달리고, 증오에 휩싸여 있고, 차별에 구속 받고 있다면, 그 사회는 좋은 사회라고 보기 어렵다. 불안과 적대의 정체성을 벗어나기 위한 부단한 제도 및 의식개혁, 나아가 정체성 정치가 요구하는 차별 없는 사회의 추구는 2020년대 우리 사회에 부여된 중대한 과제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의 굿모닝 2020s’는 2020년대 지구적 사회변동의 탐색을 통해 세계와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국일보> 연재입니다. 매주 화요일에 찾아옵니다. 다음주에는 ‘모바일’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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