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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이 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각본상ㆍ국제영화상에 이어 감독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연합뉴스

기생충이 선을 넘어버렸다. 외국어 영화 최초로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을 받았고 다른 상들도 휩쓸었다. 비서구권에 철옹성 같았던 아카데미의 선을 기생충이 넘어버린 것이다. 바이러스도 선을 넘었다. 지금 지구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더는 선을 넘지 못하게 하려고 난리다.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두려운 이때, 공교롭게도 아카데미를 휩쓴 영화의 제목이 기생충이다. 기생충과 바이러스는 사람이나 동물의 체내에 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다.

코로나가 특정 아시아 국가에서 발생했다고 하여 동양인들이 곱지 못한 시선에 시달리고 있다. 영화제가 있던 날, 미국의 방송가 존 밀러는 마침 이런 내용의 트윗을 날렸다. “봉준호라는 이름의 남자가 각본상을 수상했다. 수상 소감은 Great Honor. Thank you였다. 나머지 수상 소감은 한국어로 했다. 이런 사람들이 미국을 파괴한다.” 그에게 한국인의 영화 기생충은 선을 넘은 코로나바이러스급이었다.

흥미롭게도 ‘선을 넘는 것’은 영화 기생충의 의미심장한 주제 중 하나다. 사람 간에는 선이 있다. 적절히 지켜져야 할 선이며, 넘어가면 불편해진다. 부잣집의 동익은 가난한 동네의 기택을 자신의 유능한 운전기사로서 쾌활하게 대한다. 하지만 종종 그가 선을 넘으면 매우 불쾌해한다. 사실 기택은 이미 선을 넘었으며 교묘하게 숨기려 했다. 하지만 가난한 자기 집의 퀴퀴한 냄새가 선을 넘는 것은 막지 못한다. 봉준호 감독은 사회의 계급적 선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긴장을 자아내는지 잘 표현한다. 그의 전작 설국열차에서도 인간사회의 계급적 선과 이에 대한 절망과 희망이 그려져 있다.

성서에서도 선 긋기가 이슈인 것을 아시는지.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혼돈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어 질서를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빛과 어둠, 낮과 밤, 땅과 바다가 나뉘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반대로 이 선을 무너뜨린다. 노아 홍수 때, 둘로 갈라졌던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이 터지면서 선을 넘는다. 사실 권위 있는 이분법은 우주의 법칙과 인간의 심령에 균형과 안정을 준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누구든지 불편해한다. 선을 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반면 예수는 선을 넘는 혁명가였다. 유대교의 법을 어기고 안식일에 배고프고 병든 자를 도왔다. 유대인의 선 너머에 있는, 소외와 멸시의 대상이던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했다. 근본적으로는 신과 인간사이의 선을 넘어오셨다. 성육신하신 것이다.

예수가 선을 넘은 이유는 ‘평화’를 위해서다. “그리스도는 평화이십니다.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셨으며,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평화를 이루시고.” (에베소서 2:14-15, 요약) 선을 넘어온 예수를 유대인들은 불편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러나 이후 예수는 이타적 사랑과 희생, 평화의 동력이 되어왔다. 선을 넘었다고 하여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그어져 있는 선이 정당한 균형과 안정을 무시한 것이라면, 평화를 위해 무너져야한다. 그래서 기생충은 코로나와는 다르다. 작품상을 시상했던 제인 폰다가 ‘변화의 필요성’을 말했던 것처럼, 부당한 선을 그어온 아카데미에 기생충은 기념비적 사건이 될 것이다.

어릴 적 여자아이들이 고무줄넘기 놀이를 하면서 부르던 노래가사가 참 이상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고무줄로 선을 만들고 넘나들며 부르던 이 노래는, 다름 아닌 한반도의 삼팔선을 두고 넘나들던 한국전쟁의 비애를 부르던 노래였다. 한국인에게 ‘선 넘기’는 이렇게나 남다르다. 역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가 보다. 봉준호 감독이 언젠가 이 애잔한 선 이야기도 다루리라 기대한다. 그에게는 늘 계획이 있다.

기민석 목사ㆍ침례신학대 구약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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