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영진위 시나리오 평가 0점 받은 ‘시’, 칸영화제서 각본상

입력
2020.01.11 04:40
19면

 <45> 늦깎이로 충무로 입문한 이창동 감독 

 ※ 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며 영화보다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2010년 영화 '시'로 칸영화제 찾은 이창동 감독이 한국 언론과의 간담회를 앞두고 해변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0년 영화 '시'로 칸영화제 찾은 이창동 감독이 한국 언론과의 간담회를 앞두고 해변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창동 감독은 1954년 4월 1일 대구에서 4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집안은 퇴계 이황의 숙부이자 중종반정의 공신이었던 송재 이우(1469~1517)의 직계 후손으로 안동에서 저명한 명문가였다. 하지만 좌파 성향의 이상주의자였던 아버지는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고 온 식구가 컴컴한 단칸 셋방에서 어머니의 한복 삯바느질에 의지해 생계를 꾸려야 했다.

공납금은 밀려도 제사만큼은 옆집에서 돈을 빌려서라도 지냈고 궁핍함 속에서도 교육만은 철저했던 양반집안의 자존심, 방학 때마다 안동의 할머니 댁에 들르면서 경험한 자연 풍광과 명문의 전통은 예민한 문학적 감성과 지식인 특유의 자의식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어렸을 때 나에겐 근거 없는 엘리트주의가 있었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것은 미적이며 도덕적인 자부심으로 변해갔다.” 어머니의 자랑으로 ‘편지 잘쓰는 아이’로 소문난 그는 대구고 재학 때 문예반에 가입했고 비범한 문재(文才)를 발휘해 백일장을 잇달아 휩쓸고 다녔다.

이창동 감독이 소설가 시절이었던 1992년 소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로 한국일보문학상을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창동 감독이 소설가 시절이었던 1992년 소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로 한국일보문학상을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연극과 문학에 빠졌지만… 

삼수 끝에 경북대 국어교육과에 진학해 교사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대구 지역 연극계의 큰 기둥으로 활약하던 큰 형 이필동의 영향으로 이 감독은 연극에도 발을 걸치게 되었다.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무대 연출에서 연기에 이르기까지 연극 전반에 걸친 경험을 쌓아나갔고, 본인도 대구에서는 연기력을 인정받는 배우로 명성을 얻게 된다.

‘집안에서 형제끼리 연극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내 마음속에 선을 그었지만’ 연극 무대에서 축적된 연기에 대한 안목은 훗날 영화를 준비하면서 빛을 발휘했다. 연극배우 출신 송강호, 설경구를 충무로의 주연급 배우로 끌어올리고, 단편 ‘사랑의 힘’(1999)을 마치고 빛을 보지 못하던 신인배우 문소리, 연출부 스태프로 일하던 정진영을 발굴해냈다. ‘밀양’(2007)에서는 배우 전도연의 한계치를 끌어내는 독특한 연기지도 방식의 밑거름이 된다.

작가 이창동의 출발점은 문학이었다. ‘초록 물고기’(1997)로 감독 데뷔할 당시 이미 마흔을 넘긴 중년이었던 그는 중편 ‘전리’로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고, 1992년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 이어 단편소설집 ‘소지’ 등 2권을 출간하며 문단에서 관록을 쌓은 중견 소설가였다.

신문 연재소설도 활발히 집필했는데 영남일보에서 ‘지상의 사랑’, 경인일보에서는 ‘새벽의 아이’를 연재했고, 국제신문에 ‘늙은 연인의 노래’를 발표했다. 이때 쓴 원고는 안타깝게도 ‘지상의 사랑’을 갈아엎다시피 고치는 과정에서 노트북이 컴퓨터 바이러스가 걸리는 바람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의 시나리오 원고까지 날아 가버리는 참사를 겪었다. 그 탓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못했다. 한국사회의 산업화와 도시화, 분단의 현실을 소설로 다루고자 한 묵직한 주제의식은 데뷔작 ‘초록물고기’에서 근작 ‘버닝’(2018)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로 면면히 이어지게 된다.

단편 ‘눈오는 날’에서 면회 온 다른 병사의 애인과 대화를 나누는 대목은 ‘박하사탕’에서 순임이 영호를 면회 오는 장면으로 재현된다. 1985년 교통사고로 다섯 살 아들을 잃었던 개인사의 비극은 1987년에 발표한 단편 ‘불과 먼지’에 투영되었는데, 상실과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존재를 다룬 치열한 시선은 유괴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를 그린 영화 ‘밀양’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 소설을 썼을 때는 뭔가 남겨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흔적이 없다는 게 제일 견디기 어려웠거든. 사람의 죽음에는 남이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죽음이 있어요. 예를 들어 5ㆍ18의 죽음이 그렇죠. 하지만 어떤 죽음은 아무도 말하지 않아요. 놀랍지 않아요? 나는 놀라웠어요. 인간의 삶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이.”(영화주간지 씨네 21 2007년 3월 19일호)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 '초록물고기'는 일산 신도시를 배경으로 급속히 산업화, 도시화한 한국사회를 들여다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 '초록물고기'는 일산 신도시를 배경으로 급속히 산업화, 도시화한 한국사회를 들여다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박하사탕'은 한 남자의 기억을 되돌리며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다룬다.
영화 '박하사탕'은 한 남자의 기억을 되돌리며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다룬다.

 ◇ ‘칠수와 만수’ 시사회 뒤풀이의 인연 

이 감독과 영화의 첫 만남은 의외로 소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예영화의 대가 김수용 감독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에 출연해 네 컷 정도 찍었는데, 영화의 소재가 된 일기의 주인공 이윤복이 대구 명덕국민학교 같은 반 학우였기에 빚어진 해프닝이었다.

본격적인 영화와의 인연은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1993)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친구였던 소설가 최인석이 박 감독의 ‘칠수와 만수’(1988) 각색 작가로 참여하고 있었기에 시사회 뒤풀이 자리에 참석했던 이 감독은 박 감독과 얼굴을 익혔고, 한동안 시간이 지나 박 감독이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원작자인 소설가 임철우와의 만남을 주선해달라 부탁하려 연락한 것이 시나리오 작가를 제안받는 계기가 되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식어갈 무렵 영화 공부로 파리 유학을 준비하던 이 감독에게 박 감독은 “현장 경험이 없으면 실패한다”고 조언하며 연출부 자리를 내주었고 39세의 이 감독은 그곳에서 ‘영화의 ABC’와 영화 연출의 기본기를 배웠다.

박 감독의 다음 작품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시나리오 작가로 백상예술대상 각본상을 수상한 이창동은 배우 명계남, 여균동과 손잡고 이스트 필름을 창립해 데뷔작 ‘초록물고기’를 준비한다. 일산 신도시를 무대로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좌절하고 무너지는 청년의 초상을 생생한 리얼리즘으로 담아낸 이 영화는 1997년 제35회 대종상 각본상, 제33회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 제18회 청룡영화상 각본상을 쓸어 담았다. 소설가 이창동이 온전히 영화감독 이창동으로 자리매김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두 번째 영화는 시간이 거꾸로 가는 영화 ‘박하사탕’이었다. 이 작품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초록물고기’보다 먼저 준비되어 있었다. 경북대 4학년 시절 친구들과 고스톱을 치며 놀고 있던 그는 같은 시간 광주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알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한 남자의 생애 20년을 7개의 장으로 쪼개고,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구성을 취해 한국 현대사의 궤적을 추적해가는 ‘박하사탕’은 ‘아직도 영화가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믿는 고집스런 사람들이 만들어낸 보석‘(허문영 영화평론가)이라는 호평과 함께 프랑스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되고 체코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 진출하는 성과를 이룬다.


이창동 감독이 2010년 5월 영화 '시' 기자회견에 참석해 배우 윤정희의 발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창동 감독이 2010년 5월 영화 '시' 기자회견에 참석해 배우 윤정희의 발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심사 ‘0점’ 논란 딛고 칸 트로피 

‘오아시스’(2002)에서 이 감독은 사회부적응자인 전과자 청년과 뇌성마비 장애인 여성 간의 이색적인 사랑을 그렸다. 의도적으로 불편함을 선택한 이 영화에서 이 감독은 두 사람의 환상과 그 바깥의 차가운 현실을 교차시키며, 사회의 정상성으로부터 밀려나 소외된 존재와 이들을 철저히 차별하고 냉대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에 냉엄한 비판을 날린다.

‘오아시스’는 제5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특별감독상과 국제영화평론가연맹(FIPRESCI)상, 신인배우상(문소리)을 수상했고, 이 감독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주의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세 편의 영화를 마친 이후 이 감독의 행보는 의외였다. 노무현 정부의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입장을 고수하던 그는 1년 4개월 간을 재직하다 2004년 6월 사직서를 낸다. 3년의 공백기를 거친 그의 복귀작은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각색한 ‘밀양’이 되었다. 1988년 계간지 외국문학으로 접한 이래 이 감독은 이 이야기를 광주에 대한 메타포로 생각해왔다고 한다.

“‘벌레 이야기’에는 광주에 관한 내용이 암시조차 없는데도 나는 광주에 관한 이야기로 읽었다. 그 소설이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피해자가 용서하기 전에 누가 용서할 수 있느냐, 라고. 그리고 가해자가 참회한다는 것이 얼마나 진실한 것이냐, 그리고 그것을 누가 알 것이냐.”(씨네 21 2007년 5월 15일호)

이명박 정부 당시 이 감독은 영화계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한 사건을 겪게 된다. 영화진흥위원회가 거장 감독의 작품을 지원하는 마스터영화제작지원사업에서 ‘시’(2010)를 떨어뜨린 것이다. 당시 심사위원이 ‘시나리오가 각본의 포맷이 아니라 소설 같은 형식이라서’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규정상 줄 수 없는 ‘0점’을 준, 이른바 영화 ‘시’ 0점 사건이었다. 이러한 결정에 일침을 날리기라도 하듯, 제63회 칸영화제는 경쟁부문에 오른 ‘시’에 최우수각본상을 수여하며 한국영화의 거장에게 경의를 표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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