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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칼’ 악성 댓글에 고통 받다 생을 마감한 연예인 설리(본명 최진리) 사건이 인터넷 댓글 실명제 도입 주장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익명에 숨어 여과 없이 혐오감을 드러내는 네티즌을 제재하는 유력한 수단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주 동력원이다. 그러나 전통적 여성상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행해진 악플 공격에 설리의 인권이 희생된 것처럼, 실명제 도입이 무산된 이유 또한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판단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문제는 간단치 않다.

16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최진리법을 만들어 달라’는 청원을 비롯해 설리의 죽음을 계기로 인터넷 댓글 등 게시물의 게시자 실명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3건의 청원이 올라와 사흘 동안 약 1만명이 동의했다. 설리와 같은 연예인이나 유명인들 사이에서도 “실명으로는 표현 못할 정도의 부끄러운 글이 공론장의 장에 펼쳐져야 하냐”며 익명 게시를 허용하고 있는 현 제도를 비판하고 나섰다. 온라인 공간상의 음해 등으로 인한 피해가 연예인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표현의 자유’에 일방적으로 우선권을 둘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한때 부분적으로나마 시행됐던 인터넷 실명제가 남긴 흔적들을 보면 성급히 결정할 수만은 없는 문제다. 2007년 7월부터 시행된 정보통신망법은 하루 평균 10만명 이상 방문하는 사이트가 게시판을 설치해 운영하는 경우 해당 사업자가 이용자의 본인확인을 위한 방법과 절차를 마련하도록 의무화했다. ‘제한적 본인 확인제’ 라고도 불린 이른바 인터넷 실명제다. 하지만 2012년 8월 헌법재판소는 인터넷 실명제에 대해 재판관 전원 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위축시킨다는 이유였다. 특히 2009년 작성된 서울대 행정대학원 논문 ‘인터넷 게시판 실명제의 효과에 대한 실증 연구’ 등은 헌재의 위헌 결정에 중요한 근거를 제시했다. 논문은 인터넷 실명제 도입 전후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이용자들의 게시판 활동을 분석한 결과 비방ㆍ욕설은 줄지 않은 반면 글쓰기가 주는 등 활동이 위축됐다고 밝혔다.

논쟁 지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2015년 3월에는 헌재가 선거운동기간 언론사 홈페이지 등에 이용자가 글을 올릴 때 실명 확인을 하도록 한 공직선거법상 인터넷 실명제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게시판 등을 통해 흑색선전이나 허위사실이 유포될 경우 정보왜곡으로 인한 선거 공정성 침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취지였다. 선거 공정성을 최우선 가치로 둬 표현의 자유라는 개인 기본권 침해 여부를 따졌던 2012년 결정과 차이는 있지만 다시 곱씹어 보게 하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실명제 도입에 따른 실제 욕설ㆍ비방 감소 효과 등에 대해서도 보다 광범위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창선 PD changsun91@hankookilbo.com

조원일 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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