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를 보다, 경제를 읽다] 무너지고 균열된 바벨탑… 16세기 화가, 세계화의 위험을 예언하다

입력
2019.10.05 04:40
11면

 <16> 브뤼헐의 ‘바벨탑’ 속 숨은 그림들 

※ 경제학자는 그림을 보면서 그림 값이나 화가의 수입을 가장 궁금해할 거라 짐작하는 분들이 많겠죠. 하지만 어떤 경제학자는 그림이 그려진 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생각해보곤 한답니다. 그림 속에서 경제학 이론이나 원리를 발견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죠. 미술과 경제학이 교감할 때의 흥분과 감동을 함께 나누고픈 경제학자,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피터르 브뤼헬 ‘바벨탑’(1563), 오스트리아 미술사박물관, 114㎝×155㎝
피터르 브뤼헬 ‘바벨탑’(1563), 오스트리아 미술사박물관, 114㎝×155㎝

작금의 사회적 변화와 경제적 변혁의 핵심은 세계화에 기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화가 인간의 영혼과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세계화가 초래하는 사회경제적 붕괴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는 바로 브뤼헐이 묘사한 그림에서 찾을 수 있다. 브뤼헐이 살았던 16세기에 그가 목격한 엄청난 사회경제적 변혁은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상황과 비슷하게 맞아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은 16세기 플랑드르 지방의 대표적인 르네상스 화가로, 그의 두 아들 역시 화가로 활동하였다. 브뤼헐은 ‘중세의 가을’이 지나고 근대가 밀려오던 시기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마을 이름을 따 성을 삼았다. 1551년 안트베르펜(Antwerpen)의 화가 조합에 들어간 후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지에서 유학하였다. 처음에는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나 속담 등을 주제로 하여 그림을 그렸고, 후에 네덜란드에 대한 에스파냐의 억압에 대한 종교적 갈등을 극적인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농민들의 생활을 사실적이면서 풍자적으로 묘사하여 ‘농민의 브뤼헐’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풍경의 묘사도 뛰어나서 네덜란드 풍속화의 지평을 연 장본인이기도 하다.

 ◇변혁의 복판에 선 화가 

16세기의 엄청난 사회적 변화와 경제적 변혁은 당시 플랑드르 지방의 세계화의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에서는 농업, 수공업, 상업, 금융제도 등 각 분야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특히 브뤼헐이 살았던 안트베르펜은 조선업과 무역의 중심지였고, 이에 따라 자본과 금융제도가 정비되어 1531년 증권거래소가 생길 만큼 유럽 금융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지금의 뉴욕과도 견줄 만한 메트로폴리스였다.

브뤼헐이 목격한 사회경제적 변혁의 핵심은 바로 이 시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화의 양상과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반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시에도 경제의 현대화는 서서히 진행되었고 새로운 상류층과 빈곤층이 생겨났고 사회적 갈등은 심화되었다. 농업, 공업, 금융에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충돌했고, 도시에서는 옛날 부자와 새로운 시민이, 지방에서는 새로운 엘리트와 옛 하층민이,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에스파냐와 네덜란드가 대결하는 시대였다. 브뤼헐의 작품 중에는 당시에도 거리에 구걸하는 거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흥미로운 그림도 있다.

16세기는 1517년 마틴 루터가 내건 교회에 대한 반박문을 시발로 종교개혁운동이 퍼져나가고 있던 시기였다. 여러 개혁파 중에서 칼뱅주의(Calvinism)는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적합하였다. 특히 새로이 부상하는 상류층과 중류층에게는 대단히 매력적인 사상이었다. 왜냐하면 칼뱅주의는 직업에 열심히 종사해 성공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았다는 증거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바벨탑에 숨은 그림들 

서구문화에서는 사회경제적 변화가 초래하는 위협을 상징하는 원형으로 바벨탑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높은 곳에 오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특별할 것 없이 자연스러운 본성의 발로다. 브뤼헐이 그린 ‘바벨탑(The Tower of Babel)’은 매우 역동적이고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여 ‘숨은 그림 찾기’에 가깝다. 브뤼헐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석공에게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다. 틀림없이 탑의 건축을 명령한 니므롯 왕과 일행들이다. 특히 왕의 뒤에 회색 가운을 입은 성직자 같은 사람은 ‘회색수사’로 불리던 시토 수도회를 표현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 시대에 수사와 같은 종교가의 책무는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명확한 가치관을 제시하고 윤리적이고 경제적인 행동원칙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페테르 슈푸르크(Peter Winterhoff-Spurk) 같은 학자는 그림 속 성직자의 현대적 후계자는 바로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라고 말한다. 프리드먼은 세계화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경제학자이다. 그가 중심이 된 통화주의(monetarism)를 신봉하는 시카고학파는 ‘통화주의학파 수도회’ 쯤으로 불릴 만하다. 이들이 옹호한 철저한 경쟁적 시장자본주의의 결과 빈부격차는 극도로 심화되어 심지어 CEO가 화장실에 가는 10분 동안에 받는 돈이 1인당 최저생계비보다 훨씬 높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16세기 노동자들의 생활상 역시 대단히 열악했다. 한 가족이 1년 동안 겨우 생활하는데 필요한 금액은 65굴덴 정도였는데 이 금액을 벌기 위해서는 1년 내내 일해야 하며 아파서도 안 되고 전쟁도 없어야 했다.

 ◇게으를 권리를 외치다 

왕 앞에 무릎을 꿇은 석공 장인은 바로 브뤼헐 자신이다. 그는 격변과 혼란의 시대를 화폭에 담아 사회적 메시지를 왕에게 보이지만 자신은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혼돈의 시대에서 살아남는 그만의 방법으로 사회풍자의 메시지를 표현했다. 석공 뒤편에 있는 석재 옆면에 그는 자신의 서명을 남기고 그 앞에 자신을 상징하는 인물을 그려 넣는 ‘암시 초상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마치 히치콕(Sir Alfred Hitchcock) 감독이 자신이 만든 영화에 엑스트라처럼 등장해서 영화 속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듯이. 당시에 그림으로 사회를 비판하는 일은 오늘날 미디어를 통한 비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브뤼헬의 그림에서 작게 그렸지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똥 누는 일꾼’의 모습이다. 그 일꾼을 바로 왕의 근처에 배치한 것은 확실히 의도적일 것이다. 이는 그가 표현한 사회적 저항의 메시지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주변에는 눕거나 빈둥대는 네 명의 일꾼들을 그려 놓았다. 세속화한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는 인간이 노동에 완전히 몰입하도록 강요한다. 노동자의 스트레스는 두려움이 되고 두려움은 그를 번아웃(burnout) 상태로 몰아간다. 극단적인 상황에 몰린 노동자는 태업과 파업에 돌입하거나 아니면 해고 당해서 실업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이들 네 명의 게으름뱅이 일꾼들은 다른 일꾼들이 열심히 일하는 상황에서도 아랑곳없이 잠자거나 빈둥대고 있다. 이들의 태도는 분명히 암묵적인 정치적 주장을 담고 있다. 브뤼헐이 그린 게으르고 느린 삶은 노동자들이 바라는 행복일지도 모른다. 느림의 미학이 강조되는 작금의 시대에도 이것은 중요한 화두이다.

 ◇16세기에 발신된 ‘세계화 경고’ 

우리가 현대 사회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브뤼헐이 16세기에 느꼈을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구성원들의 이익과 목적에 따라서 결합되는 게젤샤프트(Gesellschaftㆍ이익사회)가 아니라 공동의 가치관과 감정을 기반으로 한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ㆍ공동사회)로의 이행이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는 산업화와 세계화의 과정과는 역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노동자가 개인적인 목표를 열심히 추구하는 것이 기업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라면 최선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게마인샤프트 사회일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일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것’이다. 세계화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는 현대의 상황에서도 그 선후관계는 다르지 않다. 브뤼헐은 이 그림을 통하여 인간의 게으를 권리를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일탈이 삶의 목표가 아니듯이 일중독 역시 삶의 목표는 아닐 것이다.

그림 속 바벨탑의 밑둥을 보면 아래쪽 한 부분이 무너져 내렸고 반석에는 균열이 보인다. 이 건축물은 이미 너무 크고 무겁고 불안정하다. 마치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에 중산층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우리 사회의 토대에도 양극화에 의한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화의 가속화를 초래하는 ‘터보 자본주의(turbo capitalism)'가 더 확대되도록 방치한다면 세계는 더욱 양극화될 것이고 우리가 쌓아올린 바벨탑은 더욱 불안정하고 균열은 심화될 것이다. 터보 자본주의 세상에서 인간의 모든 활동이 돈으로 계산된다면 인간의 삶조차 최종적으로 상품화되고 말 것이다. 이것이 16세기의 브뤼헐이 21세기의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자 세계화 위험에 대한 경고이다.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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