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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이야기’ 쓰는 최은영 작가 추천

게티이미지뱅크

※서사 장르에서 여성 중심 이야기는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만연한 반여성적 서사를 돌아보기 위해 최은영 소설가가 젊은 세대에게 여성 서사 콘텐츠를 추천합니다. 최 작가는 2013년 작가세계에 ‘쇼코의 미소’로 등단해 ‘그 여름’, ‘당신의 평화’, ‘내게 무해한 사람’ 등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써왔습니다.

나는 여성이 중심이 되는 서사를 좋아한다. 여성 중심 서사는 공감 가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며, 무엇보다 재미 있다.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기득권의 렌즈를 통한 인식인 경우가 많다. 특히 서사 장르에서 여성은 오랜 시간 가부장적 시선이 개입된 대상으로만 존재해왔다. 여성 서사를 읽는 것은 그러한 가부장적 시선을 벗고, 여성을 왜곡된 대상으로만 재현하는 반여성적인 서사를 돌아보는 기회를 준다. 여성 서사를 자주 접하는 일은 우리 안의 ‘미소지니(반여성적인 편견)’를 비판적으로 되돌아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최근에 본 여성 중심 서사 작품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 시즌 1,2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 시즌1, 2를 흥미롭게 봤다. 이 작품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보여주면서도 개개의 여성 인물들의 복잡한 인간성을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여성들을 미소지니의 몇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 혐오하곤 하는가. 그러나 이 드라마는 그녀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냄으로써 전형적인 성 차별 프레임을 깨뜨린다.

배우들의 수준 높은 연기는 이 여성들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하고, 하나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것인지 보여준다. 전업주부, 비혼모, 사회적으로 성공한 워킹맘, 가정 폭력 생존자, 성폭력 생존자 등… 어떻게든 여성에게 미소지니의 프레임을 뒤집어 씌워버리고 마는 세상의 시선이 얼마나 게으르고 폭력적인 것인지, 친구의 고통에 공감하고 분노하며 마침내 연대하는 여성들의 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드라마는 나타낸다.

◇조해진 장편 소설 ‘단순한 진심’

조해진의 장편소설 ‘단순한 진심’은 너무나 쉽게 잊힌, 존재 자체가 드러나지 않았던 1980년대의 기지촌 여성들과 해외 입양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요약해버린다면 이 소설에서 놓치게 되는 부분이 많이 있을 것 같다. 나는 이 이야기를 ‘잊다’와 ‘기억하다’라는 동사가 날실과 씨실이 돼 직조된 소설이라고 봤다. ‘잊다’라는 행위는 ‘기억하다’라는 행위만큼이나 능동적이다. 이 소설은 우리의 망각이 너무 많은 사람에게 강요된 침묵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강요된 침묵, 강요된 망각. 그런 침묵과 망각 속에서 소거돼버린 인간 존엄성을 이 소설은 기억하는 행위로 되살리려 한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서 결국 마음에 남는 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 관한 것이었다. 이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 받던 사람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건 누군가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다. “저는 이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믿습니다.” 작품 속 인물 ‘서영’의 말이 이 소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영화 ‘벌새’

영화 ‘벌새’는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김 감독은 이 영화로 이미 25개의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자신의 재능을 전 세계에 알렸다. 1994년, 14세였던 은희라는 아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마치 나의 이야기나 내 친구의 이야기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 시기를 살았던 한국 여성들이 일상 속에서 겪어야 했던 폭력의 순간들. 가족과 우리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숱한 슬픔의 순간들에 대해서 나는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당시 사회의 가부장성이나 폐쇄성, 폭력성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 않다. 14세 주인공인 은희는 만화가를 꿈꾸며 자신의 만화를 읽을 누군가가 덜 외로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고백하는 인물이다.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자신의 시간을 견디면서도 사랑하고 창조할 수 있는 은희의 모습에서 나는 내가 아는 여자 친구들을 떠올렸다. 순간순간 가슴이 무거워지는 장면들이 있지만, 은희의 시선을 따라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나는 좋아하기 어려웠던 과거의 내 모습의 일부와 화해한 기분을 느꼈다. 오랜만에 만난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최은영 소설가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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