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설정

[일제 강점기, 적도의 한인들] <하> 인도네시아 한인 첫 뿌리, 장윤원
'독립운동 망명객' 장윤원 선생의 차남 순일이 1960년 아트마자야가톨릭대를 공동 설립한 뜻을 기려 건물에 이름을 붙인 석판. 그둥(Gedung)은 건물, 이르(IR)는 공학자(Insinyur), J는 주니치(Junichi), P는 세례(영세)명 바울(Paul)이고, 초(Cho)는 장씨 성의 일본어 음독을 영어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19일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중심부에 위치한 아트마자야가톨릭대(Universitas Katolik Atma Jaya) 교정. 가톨릭재단 사립대인만큼 히잡을 쓴 학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본관 복도를 중심으로 뻗은 실내 곳곳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뭔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앉은 의자 구석 너머 건물 벽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석판이 하나 붙어있다.

'독립운동 망명객' 장윤원 선생의 차남 순일이 1960년 아트마자야가톨릭대를 공동 설립한 뜻을 기려 붙인 석판 앞에서 19일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GEDUNG IR. J. P. CHO 1927-1995’. 그둥(Gedung)은 건물, 이르(IR)는 공학자(Insinyur), J는 주니치(Junichi), P는 세례(영세)명 바울(Paul)이고, 초(Cho)는 장씨 성의 일본어 음독을 영어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공학자 장 바울 주니치관으로 풀이되지만 알만한 현지 한인들은 ‘장순일관’이라 부른다. 장순일(1927~1995)은 99년 전 인도네시아 한인 역사의 첫 장을 연 ‘독립운동 망명객’ 장윤원(1883~1947) 선생의 차남이다. 1960년 사재를 털어 이 대학을 공동 창립한 12명 중 한 명이다. 그 공로로 교황 바오로 2세로부터 기사 작위와 민간인에게 주어지는 최상위급 훈장인 은메달(Silver Medal)을 받기도 했다.

'독립운동 망명객' 장윤원 선생의 차남 순일이 자신이 공동 설립한 아트마자야가톨릭대 개교 30주년(1990년 6월 1일)을 맞아 교황 바오로 2세로부터 받은 실버메달을 목에 걸고 있는 모습. 김문환 칼럼니스트 제공

이역만리에서 독립을 위해 애쓰다 고문과 투옥을 당하고 그로 인해 숨진 선생의 못다한 유지를 실천한 후손을 기리는 석판에 어떤 이유로 일본식 이름이 붙었는지 현재로선 확인할 길이 없다. 학생들은 ‘Gedung Paul Cho’라는 이정표가 있는데도 정작 길을 물으면 어떤 건물인지 알지 못했고 ‘카 티가(K3)’라는 건물 번호에 익숙했다.

‘독립운동 망명객’ 장윤원 선생의 차남 순일이 1960년 공동 설립한 아트마자야가톨릭대 교정. 이정표 맨 위에 있는 'Gedung Paul Cho'가 장순일관을 뜻한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역사의 단절과 무관심 속에 웅크린 건물은 본래 이름을 잃은 채 쇠락해가고 있었다. 기자는 사연을 묻기 위해 다섯 달 가까이 장순일의 가족을 수소문했지만 약속 전날 취소되는 등 아직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장순일관’이라는 이름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현지 한인회 중심으로 막 시작됐다는 소식이, 그나마 다행이다. 건물이 품은 역사를 바로 알려면 대학 개교 연도보다 59년 이른 99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김문환(70) 칼럼니스트의 저서 ‘적도에 뿌리내린 한국인 혼’을 주춧돌 삼은 현지 한인들의 오랜 연구와 일본 쪽 자료가 일종의 타임머신이다.

'독립운동 망명객' 장윤원 선생의 차남 순일이 1960년 공동 설립한 아트마자야가톨릭대의 장순일관 전경.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1920년 9월 20일 장윤원 선생이 인도네시아 자바섬 바타비야(현 자카르타)에 발을 내디뎠다. 기록상 인도네시아 한인 역사의 서막이다. 그는 조선 말엽 중추원 의관(議官)을 지낸 장석찬의 외아들로 일본 동경제국대학 상과 졸업 후 귀국해 은행에서 일했다. 사재를 털어 해외에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다 1919년 3ㆍ1 운동 당시 은행 돈을 빼돌려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낸 사실이 발각돼 일본 경찰에 쫓긴다. 부인 백씨와 두 아들을 남겨두고 그 해 4월 만주로 탈출, 3개월 후 중국 베이징으로 피신했다. “중국보다 네덜란드령 동인도(현 인도네시아)가 안전하지 않겠느냐”는 유학 시절 지인의 조언과 도움으로 혈혈단신 적도 땅을 밟게 됐다.

인도네시아 한인 역사에 첫 장을 연 '독립운동 망명객' 장윤원 선생의 가족. 으른쪽부터 장윤원, 차남 순일, 장남 남해, 장녀 창포, 화교 출신 부인 황항아. 김문환 칼럼니스트 제공

장윤원 선생은 네덜란드 총독부의 일본어 수석통역관으로 일하며 1921년 화교 출신 여성과 재혼해 남해 창포 방기 순일 평화 등 2남3녀를 뒀다. 인도네시아 첫 한인 다문화가정을 꾸린 셈이다. 1942년 3월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불순분자’ 색출에 나선 일본군은 조선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망명한 장윤원 선생을 체포 대상 1순위로 꼽았다. 일본 주둔군 제16군사령부 헌병대에 출두한 장윤원 선생은 쇠몽둥이 매질 등 고문을 당했다. 맞은편 경찰서 유치장 등에 끌려갔다가 네덜란드군 포로들과 함께 스트루스윅(struiswijk) 형무소까지 약 20㎞를 도보 행진한 뒤 그곳에 수감된다. 포로들에게 모멸감을 주고 일제의 우월감을 과시하는 짓이었다.

'독립운동 망명객' 장윤원 선생이 1942년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고문을 당했던 일본 주둔군 제16군사령부 헌병대 본부. 현재는 인도네시아 국방부 건물로 쓰이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70여년전 헌병대 자리는 현재 인도네시아 국방부로, 형무소는 이름만 살렘바(salemba) 형무소로 바뀌었다. 약 9㎞ 떨어진 거리를 차로 달리면 30분 정도 걸린다. 자카르타 중심부에서 여전히 개발이 덜 된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두 곳 모두 삼엄한 경비 속에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 사진 촬영은 밖에서만 가능했다.

'독립운동 망명객' 장윤원 선생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1942년부터 1945년 8월 일제 패망까지 수감됐던 자카르타 동북쪽의 형무소. 현재도 이름만 바뀐 채 형무소로 쓰이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1945년 8월 종전 후 장윤원 선생도 해방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모진 고문과 비참한 수형 생활로 무너진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반강제로 인도네시아에 끌려온 조선 출신 포로감시원들의 안전한 귀국과 당장의 의식주 지원에 나섰다. 전범 재판을 받거나 사형 위기에 처한 포로감시원을 구명하기 위해 인도네시아를 다시 점령하려 했던 네덜란드 관청에 진정서를 제출하거나 네덜란드 인맥을 동원해 백방으로 뛰었다.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장남 남해의 기록에 따르면 선생이 한인 민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잠시 맡기도 했다.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47년 11월 23일 자카르타 멘텡(menteng) 자택에서 통한의 27년 망명 생활을 죽음으로 마쳤다.

'독립운동 망명객' 장윤원 연보. 김경진 기자

세월의 더께가 앉은 독립운동 망명객의 삶과 가족이 잠시 국내에 소개된 건 1971년 9월 17일자 한국일보를 통해서다. 보도에 따르면 전날 장윤원 선생의 막내딸 평화가 난생 처음 조국 땅을 밟고, 선생이 망명 전 고국에 남겨둔 아들의 아들(선생의 장손) 등 친지들을 만났다. 이어 부친이 운명 직전 손에 쥐여주었던 낡은 태극기를 꺼내 들며 “아버지께선 꿈에도 고국을 못 잊어 하시다 떠나셨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늘 강조했듯 나는 한국의 딸이다”라고 말했다.

장윤원 선생의 막내 평화의 첫 한국 방문 소식을 알린 한국일보 1971년 9월 17일자 신문. "나는 한국의 딸"이라 밝히고 친지들을 만났다. 한국일보 자료

막내 평화는 장윤원 선생이 투옥된 지 6개월째 되던 1942년 10월 태어났다. 이름엔 “내 평생 평화가 없었으니 내 딸은 내가 못 누린 평화를 누려야 한다”는 고인의 뜻이 담겼다. 평화는 1974년 여한종 전 파푸아뉴기니 대사와 결혼해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 살다 2016년 세상을 떠났다. 부친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길 바랐으나 생전의 꿈으로만 남았다.

'독립운동 망명객' 장윤원 선생의 차남 순일이 1960년 자카르타 중심부에 공동 설립한 아트마자야가톨릭대 전경. 사립 명문으로 통한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한인 역사 연구에 매진한 김문환 칼럼니스트는 “일본이 패망 직전 불리한 자료는 다 소각했고, 다시 주둔한 네덜란드가 남은 자료를 가져가서 장윤원 관련 기록이 거의 없다”라며 “인도네시아 관련 기관을 다 뒤지고 10년 넘게 사람들을 만나 고인의 삶을 추적해 희미하게 윤곽만이라도 남겼지만 공식 기록이 없어 서훈이 안 된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을 때 장윤원의 3세들을 동포간담회에 초청하려 했는데 후손들이 끝내 고사하더라. 이제 와서 파헤치는 것도 싫은 눈치고, 이미 화교 사회에 편입돼 정체성에 혼란이 올까 봐 피한 것 같다.”

'독립운동 망명객' 장윤원 선생이 묻힌 남부 자카르타 타나 쿠시르 공동묘지에서 20일 묘지 관리인들이 선생의 묘를 벌초하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20일 이른 아침 기자는 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장과 함께 장윤원 선생의 무덤을 찾았다. 남부 자카르타 타나 쿠시르(tanah kusir) 공동묘지 정문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 100여m 떨어진 곳에 부인, 차녀와 합장돼 있다. 무덤의 위치를 알려준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듬성듬성 잡초를 급히 벌초했다. “몇 년 전 누가 다녀간 뒤론 처음”이라고 했다. 사공 원장은 “9월 20일 자카르타에 첫발을 디딘 장윤원 선생을 기념해 재인도네시아한인회와 더불어 다음 달 21일 ‘장윤원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문화탐방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인도네시 자카르타 남쪽 타나 쿠시르 공동묘지에 있는 '독립운동 망명객' 장윤원 선생의 뫼. 묘비에 새긴 출생지 'SEOUL(서울)'이 선명하다. 부인 및 차녀와 합장돼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산소에 물을 뿌리고 꽃을 뿌렸다. 묘비의 ‘장윤원(張潤遠)’ 한자 이름 밑에도 일본어 음독이 표기돼 있다. 출생지를 ‘SEOUL(서울)’이라고 새긴 묘비가 반갑고 서글프다. 사공 원장이 읊조렸다. “선생의 염원이 담긴 묘지의 흙 내음과 꽃향기가 오래도록 따라올 것 같아요.” 적도의 바람이 운다.

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장이 20일 인도네시 자카르타 남쪽 타나 쿠시르 공동묘지에 있는 장윤원 선생의 묘에 꽃을 뿌리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web_cdn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