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물질 배상 포기하고 사과만 요구해 도덕적 우위 확보하자”

입력
2019.08.1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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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관계 전문가 긴급진단]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 

이원덕 국민대 교수가 13일 서울 서초구 한 호텔 카페에서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한일이 진공 상태에서 싸우는 게 아닌 만큼 국제 정세를 고려한 전체 전략 체계 속에서 국익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이원덕 국민대 교수가 13일 서울 서초구 한 호텔 카페에서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한일이 진공 상태에서 싸우는 게 아닌 만큼 국제 정세를 고려한 전체 전략 체계 속에서 국익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이원덕(57)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최근 한일 갈등이 기술 패권 다툼으로 보이지만, 본질은 한국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보복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징용 배상 판결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이 교수는 지난 6월 한국 정부가 내놓은 ‘1+1 안’(한일 양국 기업 출연 기금으로 배상하는 안)으로는 갈등의 ‘완전 연소’에 이르기 어려울 거라고 봤다.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결을 받아 볼 수 있겠지만, 패소 가능성이라는 부담을 정부가 감내해야 한다는 문제가 남는다.

이 교수는 13, 15일 진행된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의 물질 배상 포기 선언’을 대안으로 꼽았다. “‘치사해서 돈은 안 받을 테니, 너희 잘못은 확실히 알고 제대로 하라’고 일본에 숙제를 주자”는 것이다. 그는 “정신적 역사 청산만 일본에 요구하고 피해자 구제는 한국 정부가 책임지는 품격 있는 선택을 할 경우, 도덕적 우위에서 향후 대일 외교가 가능하다”며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화답하지는 않겠지만 상관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 교수는 “대통령은 폴리티션(Politicianㆍ정치인)이 아니라 스테이츠맨(Statesmanㆍ지도자)이기 때문에 외교와 국제정치를 염두에 둬야 한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한일 관계에만 매몰되지 말고 국제정치의 맥락을 고려한 전략 체계 속에서 국익을 판단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언했다.

 -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어떤 대일 메시지가 담길지 관심이 많았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썼다. 문 대통령이 제시한 극복 방법은 결국 자강(自强)이었다. 자유공정무역과 국제 분업ㆍ협업 질서를 지향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건 좋은 포인트였다.”

 _한일 갈등의 출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인가. 

“일본 수출 규제의 시작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합의의 형해화와 징용 판결 관련 한국 정부의 무책(無策)에 대한 아베 총리의 분노였다. 그러나 규제를 지속하긴 힘들 것이다. 정경 분리 국제 규범에 어긋나고 일본 국내 지지 기반도 약하기 때문이다. 기술 패권 전쟁이라고 보는 건 지금 상황에서 적절하지 않다. 너무 거시적이다. 소재ㆍ부품ㆍ장비 국산화가 능사는 아니다. 갈등 해결의 관건은 징용 문제에 대한 합리적 해법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다.”

 _한국 정부가 기금안을 내놓지 않았나. 

“한계가 명확하다. 피해자 그룹과의 조율, 청구권 수혜 기업(한국)과의 협의, 피해자ㆍ배상액 규모 가늠, 법원의 소송 시효 판단 등의 조건이 우선 충족돼야 하는데 쉽지 않다. 정부가 적극 개입해야 진전된 안을 마련할 수 있다. 게다가 기금 방식에는 근본적으로 형평성 문제가 있다. 징용 소송 사건은 강제 동원이라는 거대 빙산의 일각이다. 불거진 것만 처리한다고 역사 청산이 끝나지는 않는다.”

 _대안은 뭔가. 

“법리대로 배상을 추궁하려면 방법은 ICJ 공동 제소뿐이다. 전쟁은 안 되고 협상은 가능성이 없다면, 국제 재판에서 승소해 굴복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국가간 정치적 결정의 합법 여부를 ICJ가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식민 지배가 불법이니 배상하라는 식 판결이 나온 적도 없다. 쟁점을 좁혀야 승산이 있다. 징용이 반인도적 강제노역에 해당하는지 판명된다면 처벌 조치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_질 가능성 때문인지 정부가 ICJ행을 버거워하는 기색이다. 

“물질적 배상 요구를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다. ‘3개 항의 특별 성명’을 발표하면 된다. 식민 지배가 불법 강점인 만큼 일본이 사죄하고 반성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게 첫째 항, 배상 등 물질적 요구를 포기한다는 게 둘째 항, 피해자 구제는 한국 정부 책임 하에 수행한다는 게 셋째 항이다. 중국이 일본에 대해 행한 전후 처리 방식이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1993년 선언도 같은 취지였다.”

 _그러면 대일 전쟁에서 패배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 않나. 

“추이를 보면서 타이밍을 노려야겠지만 가장 현실적이고 쉬운 선택지다. 아베 총리의 화답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호응 여부를 상관하지 않는 일방적 선언이 도덕적 우위를 제공해 줄 수 있다.”

 _삼권분립을 강조하는 문 대통령이 그런 정치적 해법을 수용할까. 

“외교는 헌법이 보장하는 통치권자의 권한이다. 협의를 지속해도 되고, ICJ에 가도 되고, 배상을 포기해도 된다. 문 대통령은 인권변호사 출신에 폴리티션이지만 스테이츠맨, 즉 지도자다. 국제정치 행위자로 봐야 한다.”

 _행동을 망설이는 사이에 상황이 악화할 수 있다. 

“압류 자산 현금화 등 법원 강제집행 프로세스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강제집행이 현실화하면 아베 정부 강경 조치의 지지 기반이 강해질 수 있다. 원고단과 협의할 수밖에 없다. 국내법으로 투자 기업의 자산을 몰수하면 국제사회 지지를 잃을 수 있다. 한일은 진공에서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다. 동북아 국제관계의 문맥 속에서 전략적 해법을 추구해야 한다. 안보는 미국에, 시장은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아시아ㆍ태평양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헤징(위험 회피)이 필요하다. 한국의 전략적 최우선 순위는 한반도 평화다. 한일 갈등이 심화하면 일본이 남북 통일을 해로운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만큼 위험 관리를 해야 한다.”

◆이원덕 교수는

일본 정치외교에 정통한 한일관계 전문가다. ‘한일 협정’에 관해선 독보적 연구자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일본 도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10년여간 양국의 관련 외교 문서를 전부 읽고 편찬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노무현 정부 때 징용ㆍ징병 피해자 보상을 위한 심사위원회에 참여했다. 미국 피츠버그대 동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과 도쿄대 대학원 객원교수, 현대일본학회장 등을 지냈고, 올해 출범한 한일의회외교포럼 전문가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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