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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기림의 날인 14일 경기 김포시 한강시민공원 소녀상 앞에서 '제 7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제1400회 정기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다. 집회에 참가한 학생들이 소녀상에서 'NO 아베' 피켓을 들고 있다. 김포=뉴스1

7~8월 여름 휴가철은 원래 뉴스 비수기다. 신문 지면도 이 기간엔 줄여서 발행하는 게 관행이다. 온라인 뉴스 소비 역시 대체로 줄어드는 시기였다. 그런데 2019년 여름은 다르다. 7월 초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로 시작된 경제보복 때문에 일본 관련 뉴스에 독자들의 관심이 쏠렸다. ‘삼성, 일본산 반도체 소재 모두 교체’ 본보 단독 기사와 불매운동, 일제 강점기 중남미와 적도 한인들의 노력을 소개하는 기획 기사, 심지어 일본 지성인 인터뷰까지 평소보다 몇 배 이상 뉴스 소비를 끌어냈다.

온라인 뉴스 부서 입장에선 호재지만,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싸움을 당한 듯한 찝찝함 때문이다. 일본이 짜놓은 전장에 끌려갈 원인을 제공한 관료들의 뻔뻔함도 마음에 걸렸다.

포인트는 두 가지다. 먼저 일본의 기습 도발 전 우리 정부 관료들은 과연 이를 간파하고, 사전 대책을 준비했는지가 의문이다. 일본의 특기는 철저한 준비와 기습 도발이다. 1936년부터 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다룬 ‘일본 제국 패망사’에서 저자 존 톨런드는 진주만 공습 같은 기습공격이 일본인의 가치관에 깊이 깔려 있었다고 분석한다. 간결한 17음절로 조합된 일본의 하이쿠(俳句), 유도 스모 검도의 승리 방식이 그렇다는 설명이었다. “결과는 긴 준비 행동 뒤에 나오는 것으로, 기습 공격으로 결판이 난다.”

일본의 준비성은 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체결 때도 확인된다. 패전 직후인 46년 일본은 외무성 조약국을 중심으로 ‘평화조약문제 연구 간사회’를 설치했다. 철저한 조사와 자료 확보를 통해 자신의 논리에 기반한 영문자료를 준비, 미국을 집요하게 설득했다. 반면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조약 초안을 전달 받고도 대통령 비서실 실무자 책상 서랍에 2주를 묵힐 정도로 느슨했다 결국 한국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을 일본에 요구할 수 있었던 길을 막아버린 이 조약을 수용해야 했다. (김연철, ‘협상의 전략’) 과연 이번 한일 경제전쟁 때 우리는 기습에 제대로 대비를 했던 건가.

국가이익으로 포장한 관료들의 이중성은 더 근본적인 문제다. 이번 사태의 모든 원죄는 식민지배와 이를 제대로 반성ㆍ사죄하지 않는 일본에 있다. 하지만 그 다음 잘못을 따져가다 보면 결국 이전 정부들의 정책 실패와 성급했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나온다. 박근혜 정부는 취임 초 ‘정윤회 밀회설’ 보도 산케이지국장 기소 같은 어설픈 대처와 말뿐인 강공으로 일본과 감정만 악화시켰다. 그러다 다급해지니 2015년 11월 한일 정상회담을 갖고 12월 말 위안부 문제를 덜컥 합의했다. 일반적인 여론 수렴은 물론 피해 당사자 설명도 합의 다음에야 이뤄졌다. 그러면서 외교부 고위 당국자들은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이 북진을 멈췄던 결단과 현실적 제약 등을 운운하며 협상 결과를 포장했다.

관료들만 호의적이었던 그 합의는 결국 파기됐고, ‘최종적ㆍ불가역적 해결’이란 문구로 인해 우리의 족쇄가 됐다. 아베 정권은 이를 고리로 “한국이 국제적인 약속을 어겼다”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2012년 일제 강제징용 피해 배상 대법원 판결을 뭉개왔던 사법부 판사들의 농단이 지난해 10월 대법원 확정 판결 후 일본에게 반발 빌미만 줬던 일도 마찬가지다. 이번 경제보복 역시 두 사안의 연장선상에 있다.

한일 갈등을 사전 제어도 못하고, 책임도 지지 않고, 참회도 없이 또 한 자리 노리는 행정ㆍ사법부 고위 관료들. 부끄러움은 누구의 몫인가.

한일 경제전쟁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이겨낼 것 같다. 한국 산업구조 혁신, 촛불혁명 후 시민의식 재확인 같은 긍정적 효과도 예상된다.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를 얻어낸 건 민초와 시민사회의 힘 덕분이지, 관료들의 능력 때문은 아니다. 여전히, 의병보다 못한 관군이 많다.

정상원 디지털콘텐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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