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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로트레크의 ‘물랭 루주’와 상업포스터

※ 경제학자는 그림을 보면서 그림 값이나 화가의 수입을 가장 궁금해할 거라 짐작하는 분들이 많겠죠. 하지만 어떤 경제학자는 그림이 그려진 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생각해보곤 한답니다. 그림 속에서 경제학 이론이나 원리를 발견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죠. 미술과 경제학이 교감할 때의 흥분과 감동을 함께 나누고픈 경제학자,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물랭 루주’(1891), 석판화, 170㎝×118.7㎝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이 파리에서 활동할 때 파리의 예술계는 자포니즘(Japonismㆍ19세기 중후반 서양 미술계의 일본풍 선호 현상)이 유행하고 있을 때여서 그 역시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로트레크는 유화, 수채화, 드로잉뿐 아니라 카페, 무도장 등을 광고하는 포스터도 많이 제작했는데, 그는 자신의 포스터를 석판화로 찍어 많이 보급할 수 있기를 원했다. 로트레크 이전에도 복제를 위한 판화 기법이 있었지만, 그가 활용한 컬러 석판 인쇄술은 1890년대 당시로서는 새로운 분야였다. 그는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판화 작가로 활동하며 350점이나 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포스터는 단지 광고 수단이 아니라 예술로 승화된 판화로서 미술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창적 경지를 이루었다. 요즘 시각으로 돌이켜보면 로트레크는 독특한 개성이 담긴 석판화 양식을 통해 다양한 디자인의 현대 상품 광고의 원형을 이미 100여 년 전에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화가들은 포스터가 예술성이 낮다는 이유로 잘 그리려 하지 않았다. 포스터란 주문자의 요구에 맞춰 그려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기술만 활용할 뿐 아이디어와 느낌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인식이었다.

◇광고 미술을 예술의 경지로

툴루즈 로트레크는 프로방스 지방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했던 그는 추락사고로 두 다리가 불구가 되는 바람에 어른이 되어서도 키가 152㎝에 불과했다. 아들이 미술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안 어머니의 권유로 그는 불편한 장애를 안고 그림에 몰두하게 되었다. 1872년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한 뒤엔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수업을 받게 되었다.

로트레크는 초기에는 초상화를 즐기다가 점차 귀족이나 상류사회의 인물들의 허위와 위선을 풍자하는 작품을 많이 그렸다. 1890년경까지는 빈센트 반 고흐 같은 인상파 화가들과 교분을 맺으며 그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작품 가운데에는 ‘반 고흐의 초상화’도 남아있다. 고흐는 현실세계에서 겪은 역경을 주로 밖으로 나가 풍경화를 그리며 이겨 나간 데 반해 로트레크는 풍경화에는 대체로 무관심한 채 도시의 화려한 카바레나 공연장, 파리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매춘부나 광대 등을 화폭에 담았다.

로트레크는 어떤 유파나 예술 사조를 따르지 않았다. 여러 화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특정 유파의 기법에 몰입하지는 않았고 그만의 자유로운 화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개성 있고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가며 내면의 미적 욕구를 표현하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상을 정확하게 묘사해 단순한 풍속화가의 경지를 넘어섰다.

◇로트레크 미학의 원천, 물랭 루주

그를 유명하게 만든 선전 포스터 ‘물랭 루주(Moulin Rouge)’를 보자. 몽마르트르에 문을 연 대표적인 무도장인 물랭 루주를 광고하는 포스터인 만큼 물랭 루주 철자를 세 줄에 반복해서 넣으면서 첫 글자인 M을 크게 강조하였다. 주변 뭇 신사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무희는 당시 파리 무도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캉캉춤을 추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여인이 바로 포스터에도 이름을 써넣을 정도로 유명했던 라 굴뤼(La Goulue)라는 댄서이다. 이 포스터는 로트레크의 첫 번째 채색 석판화였는데 3,000장 정도 만들어서 파리 곳곳에 붙였다고 한다. 길거리 포스터의 시초인 셈이다.

불우하게 보낸 로트레크의 일생을 다룬 영화들이 꽤 있다. 가령, 음악과 화려한 색조가 돋보인 2001년 작 ‘물랑 루즈’는 니콜 키드먼이 주연 배우로 등장한 뮤지컬 영화로 제작되어 화제를 모았다. 로트레크 역시 영화에 등장하는데 비중은 크지 않다.

로트레크의 일생과 내면적 고뇌를 이해하려면 1952년에 제작된, 호세 페러(Jose Ferrer)가 주인공 로트레크를 맡은 ‘물랑 루즈’를 볼 필요가 있다.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로트레크는 대저택인 그의 집 2층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불구가 된다. 절망에 빠져 방탕하게 살아가던 그에게 물랭 루주의 매니저는 선전 포스터를 그려주면 한 달 동안 공짜로 술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한다. 영화는 로트레크가 채색 석판화 포스터를 제작하는 과정이나 그렇게 만든 포스터를 파리 거리 여기저기에 붙이는 장면을 보여준다.

몽마르트르에 정착한 로트레크는 물랭 루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물랭 루주는 그의 전속 작업장이었고 그곳에서 펼쳐진 공연들은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카바레의 무용수와 가수, 매춘부와 서커스 단원의 모습 뒤에 가려진 인간적 비애를 그만의 미적 감각으로 표현하였다. 이처럼 물랭 루주의 무대 뒤엔 로트레크의 열정과 눈물이 숨어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불우한 처지에서 오는 우울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매일 밤 환락가를 전전했고, 결국 술과 방탕한 생활 끝에 삼십대에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생애는 그만큼 드라마틱하였다.

◇포스터의 밴드왜건 효과

포스터라는 용어는 포스트(post), 즉 기둥이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홍보물은 통상 사람 왕래가 많은 거리의 기둥이나 벽에 게시돼 이목을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요새 용어로 말하면 포스터가 일종의 소셜미디어 혹은 SNS의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를 보면 첨단 광고 포스터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거리에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그 사람의 취향이나 소비 패턴에 맞는 광고물이 영상으로 나타난다. 맞춤형 영상 광고 포스터인 셈이다.

포스터의 기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편승효과를 유발하는 데 있다. 소위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로도 불리는 이 작용은, 예전에 마을에 들어온 서커스단이 어릿광대, 동물들, 북ㆍ나팔ㆍ꽹과리를 동원한 요란한 행진으로 주민들을 공연장으로 이끌던 일을 생각하면 쉽다.(밴드왜건은 다름 아닌 ‘악대를 태운 차’를 뜻한다) 먹자골목에 가면 사람이 없는 식당보다 왁자지껄한 식당에 손님이 더욱 몰려드는 현상도 밴드왜건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소비하면 자신도 소비하고 싶은 욕망을 자극 받게 돼 결과적으로 소비가 더욱 늘어나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로트레크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몽마르트르 미술관’(Mont Martre Musee)에 가보는 게 좋다. 몽마르트르 언덕을 지나 더 올라가면 한적한 길이 나오는데 이 길에는 짐노페디(Gymnopedie)를 작곡한 에릭 사티(Erik Satie)의 집이 나온다. 이 집을 지나면 바로 로트레크를 비롯해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화가들의 그림을 만날 수 있는 이 미술관이 나온다. 미술관 안뜰의 정원이 아주 고즈넉하고 운치가 있어서 쉬어가기도 좋은 곳이다.

◇시각이 해석을 좌우한다

로트레크는 언제나 감성적인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배우들과 무희들의 생활에 지친 모습에 연민을 느꼈으며, 술집 손님들의 허식과 무지를 꿰뚫어 보았고 그들의 성격을 날카롭게 풍자하였다. 그의 작품은 흥겹고 명쾌하며 독특하고 독창적이었다. 그는 인간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였으며, 뒷골목의 추악함까지도 넉넉히 끌어안은 화가였다.

영화 ‘물랑 루즈’의 한 장면을 소개하면서 마치기로 하자. 한 전시장에서 귀부인인 듯한 여인이 큰 소리로 어떻게 여인이 남자 앞에서 옷을 벗는 그림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냐고 항의한다. 로트레크가 그 부인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대답한다. “이 그림은 여인이 옷을 벗는 게 아니고 옷을 입는 걸 그린 겁니다. 또 쳐다보고 있는 남자는 그녀의 남편입니다.” 이 장면은 어떤 마음과 시각을 가지고 그림을 보느냐에 따라 그림에 대한 해석이나 인상이 달라진다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작금에 우리가 처한 정치나 경제적 상황도 어떤 이념이나 편견을 가지고 접근하면 그에 기초한 해결책 역시 잘못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가지고 사물을 보면 안 된다는 진리를 우리는 로트레크의 대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샹송 ‘물랭 루주’를 감미로운 목소리로 오롯이 들을 수 있는 점은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다.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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