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서해맹산

입력
2019.08.12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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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9일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종로구 적선동 현대빌딩에 출근하며 발언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9일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종로구 적선동 현대빌딩에 출근하며 발언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정치인들 덕에 한자성어의 좋은 뜻과 의미심장한 맥락을 배우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서해맹산(誓海盟山)’도 그렇다.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가 “장관이 되면 서해맹산의 정신으로 소명을 완수하겠다”고 각오를 밝혀 그 유래를 찾게 됐다. “산과 바다에 맹세하다”라는 뜻인 이 말의 출전은 이순신 장군이 지으신 한시 ‘진중음(陣中吟)’이다. 임진왜란이 시작되어 왜군이 한양까지 육박하자 임금 선조마저 도성을 버리고 화급히 몽진 길에 나서니, 나라의 존망이 아득했던 때다.

▦ 육상 방어선은 이미 철저히 괴멸된 상태였다. 임금의 기대 속에 경군 8,000명까지 이끌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으로 왜군과 맞섰던 당대의 맹장 신립 장군마저 분루를 뿌리며 강물에 몸을 던져버렸다. 더 이상 믿을 만한 우군조차 없었다. 시에서 막막함을 토로한 장군은 이어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ㆍ바다에 서약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ㆍ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수이여진멸(讐夷如盡滅ㆍ원수를 모두 멸할 수 있다면)/수사불위사(雖死不爲辭ㆍ비록 죽음일지라도 사양하지 않으리라)’라고 하셨다.

▦ 나라의 뿌리가 뽑힌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바다와 산을 두고 맹세해야 했던 장군의 절대고독이 500여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 봐도 절절하다. 담담하되 태산 같은 장군의 면모를 보여 주는 또 다른 말로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ㆍ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가 있다.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에 괴멸되자, 조정은 장군에게 수군이 와해됐으니 뭍에서 육군과 합류해 싸우라고 명한다. 그러자 장군이 명량해전을 준비하며 해전 의지를 임금에게 고한 장계의 내용으로 용기와 불굴의 의지가 빛나는 대목이다.

▦ 일본의 ‘경제 보복’ 탓인지 장군을 인용한 말들이 많아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전남에서 “전남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열두 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고 말했고, 조 후보자도 최근 “이순신 정신이 한국인의 DNA 속에 녹아 있다”며 국민적 극일 의지를 독려했다. 하지만 지나친 정서적 비약 아니냐는 말이 돌자 문 대통령은 “다들 (내 말을) 너무 비장하게 받아들였더라”라며 수습에 나섰다. 조 후보자 역시 직무 수행 의지를 그렇게 표현했겠지만, 장군의 극한적 상황과 비교하면 왠지 격에 맞지 않는 인용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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