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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35>이화여대 명예교수 이근후
50년 간 교수이자 의사로 산 노학자의 인생 지혜
“나이 먹어 좋은 것? 없다, 그래도 행복한 이유는...”
정신과 전문의이자 교수로 50년 간 일한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퇴임 이후엔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을 전파하며 산다. 이 교수를 24일 서울 종로구의 가족아카데미아 사무실에서 만났다. 홍인기 기자

“차선(次善)으로 살면 돼요.”

차선? 인생은 대개 최선이 지배한다. 최선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열정을 쏟아 붓는다. ‘최선을 다하자’는 그래서 보통의 좌우명이다. 그런데 여든 넷, 이 인생의 대선배는 차선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왜 이루지도 못할 텐데 나의 100%를 쏟아 부어야 하느냐”는 반문이다. ‘차선으로 사는 방법이 있었구나.’ 생각 만으로도 편안해진다.

정신과전문의로 50년 간 진료하고 학생을 가르친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인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살 거라면’ ‘야금야금 즐기면서’로 압축할 수 있다. 살아가는 동안이라는 과정에 집중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가 쓴 여러 저서 중에서도 2013년 출간한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와 지난달 초 낸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엔 그의 인생 비법이 농축돼 있다. ‘나는 죽을 때까지…’가 6년 간 38만부나 팔리는 스테디셀러가 됐고, 신작도 두 달 만에 5쇄를 찍은 걸 보면 그는 과연 한국인 공통의 관심사를 건드린 듯하다. 그것은 아마 나이와 재미, 두 가지가 아닐까. 서른 중반을 넘어가면 대개 ‘나이 듦’을 인식하게 되는데다 나이와 성별 불문의 고민은 ‘재미없는 일상’이니까.

정작 그의 객관적 조건을 보면 딱히 이 고민의 해법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 정년 퇴직한 지 18년, 아흔을 바라보는 노구에는 지병에 노환까지 와 여덟 가지 병을 앓고 있다. 최근에 더해진 하나가 오른쪽 눈의 황반변성이다. 이미 왼쪽 눈의 시력을 잃은 그에게 오른쪽 눈은 세상을 보는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야금야금, 지금 여기의 행복을 누리며 산다. 퇴직 이후 사이버대에 들어가 과 수석을 했고, 더 공부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또 다른 대학에도 입학했다. 눈이 안 좋아진 ‘덕분’에 손녀가 글 쓰는 일을 도와 공동저자가 되는 기쁨을 얻었다.

야금야금,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며 살고 있기도 하다. 38년째 네팔에 매년 가 의료봉사를 하고 있고, 시인들과 보육원생들을 시작(詩作)으로 이었다. 20년 전 시를 좋아하는 그가 만든 낭송 모임과 그가 봉사해오던 보육원을 문학으로 연결한 것이다. 시 쓰는 일을 가르치고 백일장을 열어 상을 줬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도 생전 흔쾌히 시상에 동참했다.

‘나이 드는 게 뭐가 유쾌할까’, 질문을 안고 서울 종로구 세검정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의 사무실에서 그를 마주했다. 만나기 전까지 그가 단칼에 ‘없다’고 대답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가족아카데미아는 그가 사회학자인 부인 이동원 전 이화여대 교수와 퇴임 후 만든 생애 교육터다.

◇나도 실은 죽음을 생각하기 싫다
자신을 직시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이근후 명예교수가 말하는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의 시작은 인정이다. 홍인기 기자
-‘나는 죽을 때까지…’가 현재까지 87쇄를 찍었는데, ‘백 살까지…’은 한 달도 안돼서 1만 5,000부가 팔렸네요. 왜 이 책들이 인기가 있을까요?

“이 책들을 주제로 강연을 하면 꼭 나오는 질문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느냐’는 거예요. 그러면 내 대답은 똑같아요. 내가 언제 재미있게 살았다고 그랬냐는 거지. 제목에 나도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적은 거 아니지 않느냐고요. 그러면 깜짝 놀래요. 하하.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인생에서 즐거움 보다는 즐겁지 않은 일이 훨씬 많았어요. 특히나 젊을 때는 지나놓고 보니 ‘즐거웠구나’하는 거지, ‘지금이 즐겁구나’하기 쉽지 않죠. 그렇지만 요새는 이 순간 자체가 즐거워. 히어 앤드 나우(here and now)가 즐거운 거죠. 상대적으로 여생이 짧아지니까 바로 즐거움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나는 죽을 때까지…’는 출판사의 기획 덕분에 베스트셀러가 된 면도 있어요. 그래서 내가 강연 가면 인생에 빗대서 ‘인생 2막도 잘 기획해야 베스트 라이프가 될 수 있다’고 말하죠(미소).”

-제목에 사람을 끌어 당기는 힘이 있어요.

“2013년 낸 책은 내가 애초 제목을 ‘나는 즐겁게 살고 싶다’로 했어요. 그런데 출판사 편집실에서 ‘죽을 때까지’를 넣었죠. 내 마음을 들킨 것 같더라고요.”

-어떤 마음이요?

“나는 죽음, 뭐 이런 걸 입밖에 내기가 싫었거든요. 연령적으로 그랬죠. 그 문구를 넣으면 낫겠지만, 내가 입에 올리기가 싫은 거예요.”

-책을 읽어보곤 죽음을 의연하게 생각하실 줄 알았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기본적인 불안이죠. 태어남이 있으면 소멸이 있는 거니까. 젊을 때는 생명의 기한이 오래 남았다고 생각하니까 실감하지 못할 뿐이죠. 그런데 기한이 가까워지면 입에 올리기가 좀 그래요. 그 말을 올리면 금방 죽을 거 같은 거야. 그런데 이건 비논리적인 생각이잖아요? 하하. 불안인 거죠. 그런 불안을 잠재울 소소한 재미들이 오거나 그런 일을 찾아서 하면 잠재될 뿐이고요. 지금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것도 즐거워요. 지금의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니 불안은 잠시 뒷방으로 물러나 주는 거죠. 끝나면 또 올라오겠지.”

-현재의 행복에 집중하는 거군요.

“그렇죠. 누구나 갖는 불안이지만, 나는 다만 다루는 방식이 다른 거예요. 과거의 집착과 미래의 걱정을 하지 않는 것. 과거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거든. 미래도 마찬가지에요. 오지도 않은 세월의 일을 걱정하면 지금의 즐거움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과거의 집착과 미래의 걱정이 지나치면 (정신적인) 환자가 되는 거고요. 내가 유쾌하고 즐거운 삶을 살려면 그 두 가지로부터 자유로우면 되는 거예요. 정신과 의사로 살아서 얻은 깨달음이죠. 환자가 내 스승이었어요.”

-나이를 건드린 것도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한 요소이고요. 언제 ‘나도 나이 들었구나’ 생각하게 됐는지 궁금해요.

“나는 젊을 때부터 그랬어요.”

-왜 그랬나요?

“환자를 진료할 때 차트를 먼저 보잖아요. 거기서 나이 기록을 보면 내 나이를 떠올리게 되거든요. 특히 내 나이와 비슷하면 어떤 사람이 들어올까 생각도 하고요. 그런데 정년 퇴임하고 나서는 나이를 헤아리기가 힘들어졌어요.”

-어떤 의미인가요?

“(60대일 때) 누가 나이를 물으면 ‘6학년입니다’ 그러거나, 요새 말마따나 ‘6호선 타고 다닙니다’라는 식으로 넘어가기도 했고요. 그런데 70대가 지나고 80대에 들어서는 말하기가 싫어요. 대답은 해주지만 흔쾌하지 않은 거죠.”

-먹어가는 나이를 받아들이기 힘들기도 했나요?

“정년 퇴직하고 나니까 시니어카드(어르신 교통카드)가 나오더군요. 노인인 걸 일부러 실감하려고 2호선 전철을 타고 이쪽 방향으로도 돌고 저쪽 방향으로도 돌았어요. 노인석에 가지 않고 일반석 앞에 서 있어 보기도 하고요.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젊게 보일 때지. 내가 서 있으면 젊은 사람들은 대개 휴대폰 하기 바빴죠. 나를 힐끗 쳐다보고 다시 하던 거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니, 이 자식은 제 애비도 없나’ 하는 감정이 올라오는 거예요. 또 일어나서 ‘할아버지, 앉으세요’ 하는 젊은이를 보면 이번에는 속으로 ‘아니, 이 녀석 봐라. 니 눈에는 내가 할아버지로 보이냐’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하하. 비켜 주기를 바라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는 양가감정이죠. 그런 경험적인 갈등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나도 늙었구나’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퇴임하기 전에 인생의 후반기를 어떻게 살지 기획을 미리 해뒀나요?

“기획은 못했고요. 반성을 많이 했어요. 등산을 좋아하니까 그에 빗대면 반나절에 산 정상에 오른 거잖아요. 남은 건 내려갈 일 밖에 없으니까 어느 길로 내려갈지를 생각한 거죠. ‘저런 길로 가면 올라올 때 보지 못했던 걸 좀 보겠구나’ 하면서 선택할 수도 있고요. 그 중 하나가 가족아카데미아예요.”

-이 사무실이죠. 어떤 일을 하나요?

“하나는 사회 교육, 부모 교육, 상담사 심화교육 같은 교육이고 다른 한 트랙은 봉사예요. 봉사도 여러 개를 하는 것 보다 집중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국내에서는 보육원, 그리고 네팔 의료 봉사를 하고 있어요.”

그는 이화여대 재직 시절 네팔이화의료봉사단을 만들어 이미 13년 간 해마다 네팔로 의료봉사를 갔던 터였다. 이후에는 문화교류 행사로도 확장했다. 퇴직 이후엔 가족아카데미아의 이름으로 그 활동을 지속한 것이다. 한참 설명을 하던 그가 말을 꺼냈다.

“한국일보와도 인연이 있어요.”

-무슨 사연인가요?

“1980년대에 전국 대학에서 데모가 일어나니까 학생도 교수도 참 괴로웠죠.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전신)에서 지도교수더러 학생들의 행적을 적어 내라고 했으니까요. 농활도 가지 못하게 했죠. 그러니 학교도 골치가 아팠어요. 그때 내가 해외로 나가면 되지 않느냐는 아이디어를 낸 거예요. 그러면 학교도 허가를 해줄 거라고. 농촌이 한국에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결국 학교에서 허가를 했는데 조건이 재정 지원은 못한다는 거였죠. 그 때 내가 한국일보사를 찾아갔어요. 한주여행이라고 한국일보에서 하던 여행사가 있었거든요. 취지를 듣더니 그때 한국일보에서 도움을 줬죠. 이후로도 10년간 봉사대원들 왕복 비행기 티켓을 지원했어요. 그걸 계기로 의료봉사가 시작된 거예요. 한국에서 해외 의료봉사를 한 건 이화(여자)대학이 처음이죠.”

◇인턴 시절 옥중에서 품은 앙심
삶을 결정하는 큰 줄기는 실은 우연인 듯 느껴지는 순간들인지도 모른다. 그 역시 “인생은 우연인 것 같지만 실은 우연이 아닌 일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어린 시절엔 몸이 약했다고요.

“병이 특별히 있는 건 아니었는데 약했어요. 키가 178㎝인데 몸무게는 55㎏였죠. 그러니 어머니가 과보호를 하셨어요(웃음). 예를 들면 물가에는 가지도 못하게 했으니까요. 나는 모범생이었고 엄마 말을 잘 들었으니 물 근처에도 안 갔죠. 하하. 지금도 물은 싫어요.”

-고교 시절 미대를 희망했는데 어떻게 의대에 가게 됐나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그림을 진짜 잘 그려서가 아니라 미술 선생님이 칭찬을 해주니 기분이 좋았던 거죠. 칭찬을 받으려고 연습해서 미술 시간에 그릴 만큼. 그래서 미대에 가려고 했는데 그때 집이 망해서 힘들었어요. 고등학교 월사금(등록금) 내기도 어려웠죠. 그래서 어떻게든 학교 다니는 기간을 줄이려고 대입 검정고시를 치러서 합격을 했죠. 국비로 갈 수 있는 대학을 찾다가 육군사관학교를 생각했어요. 담임한테 찾아가서 사정 설명을 하니 ‘잘 생각했다’면서도 이런 말을 해주더군요. ‘그런데 네가 단축하려는 1년은 일생 전체를 놓고 보면 찰나에 지나지 않으니 너무 얽매여서 결정할 필요는 없다’고요.”

-훌륭한 충고네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그 뒤 미대에 지원했나요?

“아뇨. 생각해보니 나는 연습해서 그리는 게 한계더라고요. 미술은 모방이 아니라 창작인데 나는 창의력이 없었어요. 창의성이 없어도 갈 수 있는 곳이 어딜까 생각해서 법대와 의대 중에 의대(경북대)를 택한 거죠.”

-나중에 정신의학으로 전공을 택한 이유는 뭔가요?

“미대를 포기하고 갔으니 의학에는 취미가 없었을 것 아니에요. 하하. 마음을 못 붙였죠. 그래서 그 때 생각으로 가장 의사답지 않은 의사가 뭘까 생각해서 정신과를 택했죠. 해보니까 진짜 어려운 학문이었어요. 사람의 마음이란 원인이 규명되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그 시절에 정신과 의사가 별로 없다 보니 방송에 불려 다니거나 신문에 칼럼을 써달라는 부탁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누적되다 보니 말도, 글도 늘더라고요.”

대학에 간 그는 고교시절과는 180도 달라졌다. 학생회에 참여하고 산악회와 시문학동인회를 만들었다. 일간지에 이른바 ‘어용 총학생회’를 꾸리려는 대학 측의 행태를 비판하는 글을 투고해 학교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5ㆍ16 군사 쿠데타(1961) 이후엔 4ㆍ19 혁명(1960) 시위의 주동자로 지목돼 뒤늦게 징역 10월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옥중생활은 어땠나요?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데 몇 년이나 지난 일로 유죄를 받은 거였어요. 하하. 당시 정권은 그걸 ‘혁명’이라고 했죠. 수감생활은 두 번째였는데 그때는 기결수로 들어간 거죠.”

-첫 번째는요?

“4ㆍ19 당시인데 그때는 (구속 기소가 돼서) 재판 중에 구치소에 있었죠. 그런데 결국 고등법원에서 선고 유예가 된 걸 나중에 5ㆍ16 이후 대법원에서 판결을 한 거예요. 처음 수감됐을 때 형무소 들어 앉아서 결심 한 게 있었어요. 나를 잡아 가둔 것에 대한 앙심이죠. 일생 동안 군인, 경찰, 교도관은 절대로 진료를 봐주지 않겠다고 말이죠. 조사 받으면서 하도 맞고 빨갱이가 아닌 걸 증명하라느니 하는 황당한 강요를 당해서… 하지만 의사로서는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무튼 그때는 그렇게 결심을 했어요. 그런데 그게 나중에 허물어졌죠.”

-어떤 일이 있었나요?

“응급실 근무 때 교통사고가 나서 응급환자가 실려 왔는데 (신분이) 교도관인 거예요. 머리를 다쳐서 급히 수술을 해야 했죠. 그런데 당시 경북대병원에는 신경외과가 없었어요. 그런데다 내가 결심한 게 있었잖아요. 그래서 환자를 데리고 온 동료 교도관들에게 여기서는 수술할 수 없으니 옮기라고 했죠. 그럼 서울로 가야 하는데 그런 상황이면 이동하다가 죽을 확률이 높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런데 뒤늦게 병원으로 온 중학생 아들이 내 가운 자락을 잡고는 아빠 좀 살려달라고 하소연을 하는 거예요. 수술 하다가 돌아가셔도 괜찮으니 하기만 해달라는 거죠. 교복을 보니 내가 졸업한 경북중 학생이었어요. 마음이 찡하더라고요. 내가 미워한 대상은 나를 괴롭힌 그 교도관, 경찰, 군인이지 그 직종의 모든 사람은 아닌데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외과 과장 집으로 찾아 갔죠. 수술하자고요. 당연히 나더러 돌았느냐고 하죠. 외과 의사는 배를 열어서 수술하는 사람이지, 머리는 아니니까. 제가 지금 머리 째서 수술할 의사가 없으니, 그래도 (배라도) 째 본 사람이 해야 할 거 아니냐고 설득했죠. 선배인 그 외과 의사가 고집도 세다면서 결국은 병원에 와서 수술을 했어요. 내가 보조를 하고요. 열어서 보니 혈관을 다쳐서 출혈이 된 거였죠. 비교적 수술하기 쉬운 경우였어요. 그래서 환자가 살았어요.”

-다행이네요.

“뇌를 다쳤으니 말은 약간 어눌해졌지만, 잘 회복해서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죠. 나는 그런 식으로 정리가 됐어요. 미워하고 해도 대상을 제대로 미워해야지, 직업이 같다고 앙심을 가지면 안 되는 거였죠. 그 시절에는 그게 나한테 큰 깨달음이었어요. 그런데 인턴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대법원에서 선고를 해서 징역살이를 하게 된 거야. 하하. 그래서 교도소에 갔는데 의무반에 배치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거기서 그 교도관 환자를 만났어요.”

-와…!

“내가 살려놓은 그 사람이 교도과장이 돼있더라고요. 그러니 내가 죄수복을 입고 있긴 하지만 나를 얼마나 칙사 대접 했겠어요. 하하. 또 의무부장은 내 선배였고요. 그래서 재미있게 살다가 7개월 만엔가 특사로 나왔죠.”

-신기하네요.

“막연하지만 인연이란 게 이런 거구나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가 이렇게 인터뷰 하는 것도 우연인 거 같지만 한 백 만년 전에 정해졌던 것 아닐까요? 하하.”

◇닫힌 것 같아도 다른 문은 있다
중고교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그는 의사가 된 이후에도 미술을 놓지 않았다. 그가 한옥의 문살에 네팔 우표를 붙여 만든 설치 작품을 보며 설명하고 있다. 우표 수집도 그의 취미 중 하나다. 홍인기 기자

특사로 출소했지만, 현실은 막막했을 터다. 전과자 의사를 어느 병원에서 쓸까. 그는 그래도 살 방도를 궁리했다. 국립 정신병원장에게 편지를 쓴 거다. 당시 국립 정신병원은 보통 의사들이 기피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한 자리쯤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는데 원장이 뜻밖에도 그를 받아줬다. 그래서 4년 간 국립 정신병원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마쳤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갑자기 군입대 통지서가 날아왔다. 4ㆍ19가 혁명으로 재평가 되면서 관련자들의 사면 복권조치도 뒤따랐기 때문이다. 전과자 딱지가 떼어지면서 병역의 의무가 따라온 거다. 제대 후에도 오라는 데가 없었다. 그는 정신과 의사 선배들을 찾아 다니면서 제대 인사 겸 조언을 구했다. 그때도 예상치 않게 문이 열렸다. 연세대에서 전임강사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연세대를 거쳐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겼고 정년까지 교수로 학생을 가르쳤다.

-굉장히 적극적이었네요.

“그때는 그랬나 봐요. 어디서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죠.”

-이화여대로 가서는 정신과 병동을 폐쇄형에서 개방형으로 바꾸고 사이코 드라마 치료도 최초로 시작했죠.

“이화(여자)대학에 과장으로 갔거든요. 그러니 내 뜻대로 할 수가 있었어요. 사실 교과서대로 한 거예요. 그 시절 정신과 병동은 형무소 같았어요. 내가 교도소에 갇혀본 적이 있어서 알잖아요. 꼭 그렇게 형무소에 감금하듯이 환자를 뒀죠. 그걸 개방형으로 바꿔서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교과서대로 바꾼 거예요. 그러면 의료진은 더 긴장하고 환자를 돌봐야 하죠. 폐쇄형 병동은 의료진이 긴장할 필요가 없는 구조예요.”

-절망적인 상황에도 긍정을 잃지 않는 비결이 뭔가요?

“내 천성이 원래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정신과 의사로 살다 보니 그런 태도를 갖게 된 것 아닌가 해요. (정신적인 문제로) 환자가 되는 이유는 집착과 걱정 때문이거든요.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걱정 말이죠. 이런 부정적인 요소를 없애는 거예요.”

-말은 참 쉬운데 보통 잘 되지가 않아요.

“상황을 거부하지 않으면 돼요.”

-그런데 선생께선 당뇨에 고혈압, 거기다 왼쪽 눈은 시력을 잃었고 오른쪽 눈도 황반변성이 왔죠. 이런 상황만 놓고 보면 긍정적으로 대처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지금은 세상에 없는 내 친구 중에 철학자가 있었어요. 그 놈하고 대화하면 종국에 가서는 늘 ‘할 수 없지, 뭐’ 하고 말이 끝나는 거예요. 친구의 그 대답이 참 좋다고 생각했어요. 해보지도 않고 ‘할 수 없지, 뭐’ 하는 게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할 만큼 다 해본 다음에 나오는 말이었거든요. 마찬가지로 나도 처음부터 긍정 마인드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에요. 나한테 주어지는 갈등과 불안을 일단 다 수용해야 다음을 모색할 수 있죠. 그런데 그 상황과 시비를 하면 힘만 빠지고 심해지면 병이 돼요.”

-책 제목 앞에 붙은 수식어처럼 ‘어차피 살 거라면’ 말이죠?

“그렇죠. 어차피 살 건데, 살면서 왜 자꾸 나를 낳았느냐 하면 뭘 해요? 이미 살고 있는데. 기왕 눈 떴으면 재미있는 구석은 없는지 살펴보자는 거지.”

-나이가 들어 좋은 점과 나쁜 점 중에 뭐가 더 많을까요?

“나이 들어서 좋은 건 하나도 없어요.”

-의외인데요.

“그게 대전제예요. 그런데 그 다음에 내가 생각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은 없을까 생각하는 거예요. 내 사고체계는 그렇게 돼있어요. 늙어가는 게 즐거울 일이 뭐가 있어요? 기운 떨어지고, 얼굴도 이상해지고, 병도 생기고, 좋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움이 있어요. 예를 들면, 내가 오른쪽 눈마저 노인성 황반변성이 와서 원고를 직접 탈고할 수가 없거든요. 눈이 안 보인다는 건 참 슬픈 일이에요.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래서 손자, 손녀한테 제안을 했죠. 정부에서 권장하는 최저임금인 1만원 시급을 줄 테니 나를 도와 달라고요. 손자, 손녀에게는 아르바이트가 되는 거죠. 그 구실로 (구술하면) 손자, 손녀가 원고를 써주기도 하고 또 그러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할 수가 있어요. 눈이 안 나빠졌으면 그런 시간을 보내지 못하겠죠.”

그 덕분에 손녀와 함께 번역한 책은 나란히 공저자로 이름을 올리는 기쁨도 만들었다.

◇나이와 싸워봐야 소용 없다
그의 책들이 꾸준히 사랑을 받는 이유는 아마 나이 먹는 게 버겁고 일상이 재미없는 나 같은 사람이 많아서가 아닐까. 김지은 기자
-보통 서른 중ㆍ후반이 되면 점점 나이가 인식 될 텐데요, 그래서 나이 드는 게 싫다는 사람도 많고요.

“그게 어리석다 그거야, 하하. 그렇다고 나이를 안 먹나요? 그러니 빨리 인정하고 나이 먹는 재미를 봐야 해요. 그게 ‘히어 앤드 나우’예요. 이미 지나갔는데 아닌 체 하다가 지금 나한테 오는 기회를 못 보는 거예요. 눈에 보여야 잡지, 안보이면 못 찾아.”

-나이 드는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걸 꼽는다면 뭐가 있을까요?

“우선 인정이죠. 그 다음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면서 사고를 바꿔야 해요. 그리고 그걸 행동으로 연결해야 하죠. 자꾸 행동을 하다 보면 습관이 붙는 거니까.”

-젊은 세대에 해줄 말이 있다면요.

“젊은 사람들은 그들의 가치가 있기 마련이죠.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거예요. 내 경험은 농경사회에서 시작하는데, 지금은 정보사회를 뛰어 넘고 있잖아요? 오기는 왔는데 나는 적응을 못하고 있고요. 그런데도 우리 친구들이 모이면 ‘우리 땐 안 그랬는데’ 하면서 젊은 사람들 걱정을 해요. 하하.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던 시대를 산 사람들이에요. 그 경험으로 3만달러 넘는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을 앉혀놓고 강의를 한다? 그게 먹히겠어요? 하하.”

-평생 돕고 살아온 게 귀감이 돼요.

“내가 미련해서 그런지 몰라도 표 안 나게 시작해서 하다 보니 계속 이어지더라고요. 모두 작정해서 거창하게 시작한 게 아니었어요. 네팔 의료봉사도 82년부터 다녔는데 해마다 늘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가야 하는 계기가 자꾸 생기더군요. 그래서 내가 잘 쓰는 말 중 하나가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라는 거예요. 듣기 따라서 성의 없는 대답일 수 있지만 진짜 그렇거든요. 보육원 봉사도 그래요. 전쟁 때는 고아들이 보육원에 갔지만, 요즘은 부모 없는 아이들이 없어요. 그러니 ‘왜 나를 버렸을까’ 하는 앙심을 갖지 않도록 돕고 싶었어요. 처음엔 물질적인 봉사를 하다가 그래서 감성적인 교류를 시작한 거죠. 내가 1999년에 만든 시낭송회 모임의 문인들과 함께 시 쓰는 걸 도와서 문집도 내고 해마다 상을 줬어요. 박완서 장원상도 있었죠.”

일면식도 없는 박완서 선생에게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시상을 직접 해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한 거다. 박완서 선생은 첫 해 시상식 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평생 이런 일에 참여해 본 적이 없어요. 무슨 모임에 나서는 것이 거북하고 내 이름 걸고 상 주는 일도 없었죠. 그런데 유독 이 일은 마음에 끌려요. 이 상을 오래 주기 위해서라도 오래 살아야겠어요.” 2011년 작고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해마다 시상식에 참석해 아이들에게 상을 주고 마음을 보듬는 말을 해줬다니, 그가 선생을 따뜻하게 기억하는 이유다.

“행동은 야금야금 해야 하는 거예요. 봉사도 그래서 오래 할 수 있었죠.”

-야금야금 해온 일이 정말 많던데요?

“막내가 어릴 때 하루는 제게 그랬죠. 아빠의 정체를 밝히라는 거예요. 화가냐, 교수냐, 의사냐, 등산가냐는 거죠. 하하. 사실 내가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에요. 따지고 보면 모두 하나의 줄기에서 나간 일들이죠. 그건 바로 ‘마음’이에요. 마음을 연구하고 마음이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게 내 주된 일이죠. 다른 일들도 다 그와 관련돼있어요. 봉사도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이고, 시를 쓰는 일도 마찬가지죠.”

그는 공부의 끈도 놓지 않았다. 퇴직 후 고려사이버대학 문화학과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다시 공부를 해보니 어떻던가요?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졸업하면서 ‘아이쿠, 잘못했다’ 생각했죠.”

-왜요?

“더 다니고 싶은데, 왜 빨리 졸업을 했을까 후회가 되는 거예요. 졸업장이 필요해서 등록한 게 아닌데 말이죠. 학기에 한 과목 정도만 신청해서 오래 할 수도 있는데. 그래서 같은 데 또 들어갈 수는 없으니 다른 사이버대학의 상담학과에 들어갔어요. 상담은 내 전공이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론적으로 정립한 건 어떨지 궁금해서요. 몇 년 듣다가 포기했죠.”

-그건 또 왜요?

“수업을 들을 때는 다 알겠는데 (컴퓨터를) 끄면 잊어버리는 거예요. 기억을 해야 어디서 내가 강의 할 때라도 떠올려서 써먹을 수가 있는데. ‘이제는 머리가 안 되는구나’ 싶었죠.”

-좀 울적했을 것 같아요.

“그래도 뭐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지식과 경험도 많으니까요.”

그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스쳤다.

◇뱁새는 뱁새고 황새는 황새
“차선으로 살아왔다”는 그의 인생이야 말로 최상 아닐까. 홍인기 기자
-운전을 평생 하지 않았죠?

“1970년에 면허를 땄는데, 옆에 앉아있던 시험관이 운전 몇 년 했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운전면허 시험 보러 온 사람이 무슨 운전 해본 일이 있겠느냐고 처음이라고 했죠. 듣더니 시험관이 아니라는 거예요. 정말 처음이라고 그러니까, 그렇다면 운전을 너무 저돌적으로 한다고 하더군요. 저돌적이라니 깜짝 놀랐죠.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인데 운전을 저돌적으로 한다면 하고 다녀도 되겠나 싶었어요. 그래서 ‘장롱 면허’예요. 그런데 택시를 타는 게 나한테는 더 이익이었죠. 차 안에서 생각하면서 원고를 몇 개는 쓸 수 있으니까. 하하.”

-휴대폰은요?

“일할 때는 집과 진료실만 왔다 갔다 하니 필요가 없었어요. 휴대폰이 있으면 밖에 있을 때도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을 거 아니에요. 나도 쉬어야 환자를 보지. 그래서 안 썼어요. 그런데 휴대폰은 좀 하나 쓸 걸 싶어요.”

-후회가 되나요?

“너무 불편하거든요. 지금은 쓰고 싶어도 눈이 안 좋아져서 쓸 수가 없지만. 예를 들면, 인터넷에서 동호회 하나를 들려고 해도 나를 휴대폰으로 입증하라는 거야. 휴대폰이 아니면 자기 확인이 안 되는 거예요. 나는 일찍부터 (PC로) 인터넷을 해서 학생들 가르치는 데도 엄청 활용했거든요. 그러니 휴대폰으로 인터넷 할 생각은 안 했는데, 사회가 발전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졌어요. 내가 이토록 변화될 때까지 오래 살리라고 예견을 못했고요. 하하. 그 와중에 내가 휴대폰(이라는 문물 습득)을 놓친 거죠. 네팔에 가서 사진을 찍으려고 해도 36장짜리 필름 100통을 짊어지고 가서 찍고 인화하고 앨범에다 꽂아 두고 하느라 힘들었는데 휴대폰이 있었으면 더 쉽게 많이 찍었을 것 아니에요? 그러니 후회가 돼요. 게다가 급하게 연락을 해야 할 때 할 수도 없어요.”

-실제 그런 일도 겪었나요?

“대구에 강연을 가느라고 기차역에 앉아 있는데 기차가 연착이 된 거예요. 그래서 주최측에 알려줘야 하는데 전화가 없잖아요. 그래서 옆 사람에게 이런 급한 사정이 있는데 휴대폰 좀 빌려줄 수 있겠느냐고 해서 빌렸는데 쓸 줄을 알아야지. 번호는 눌렀는데 어떻게 해야 신호가 가는지 알아야 말이죠. 그런데 쓸 줄 모른다는 소리는 못 하겠고… 바보 같지. 그래서 그냥 돌려주면서 통화 중이라고 하고 말았죠.”

처음 보는 기자 앞에서 화려한 경력의 노학자가 이런 사연을 털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

-저만 해도 요즘은 새로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종류가 많아져서 제쳐 두고 살면 뒤쳐지기 순식간이겠다는 위기감이 들어요. 그런데 이걸 다 하고 살아야 하나 하는 갈등도 있죠.

“안하고 살아야지. 근데 안하고 살만큼 김 선생이 자아가 강하냐 그게 문제죠.”

-안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요?

“불필요한 정보를 내가 다 소화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요즘 SNS에는 불필요한 정보가 너무 많아요.”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자기가 자기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이죠. 자기의 존재를 자기부터 존중해야 남이 나를 존중할 수 있거든요. 상담할 때 보통 환자들이 그래요. 자기는 누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럼 제가 그러죠. 당신 같은 사람이 지구상에 또 있으면 데리고 와보라고요. 똑 같은 존재는 없으니 당신은 유일종, 굉장히 중요한 존재라고 말해줘요.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가 가랑이 찢어진다는 속담이 있는데, 나는 그렇게 바꿔요. 황새는 뱁새 둥지에 들어갈 수 없다고요. 황새는 황새고 뱁새는 뱁새라는 거죠.”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나요?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건 생각하는 사람 마음이지. 하하. 완전히 다른 사람들의 몫이에요.”

-살면서 지키려고 한 삶의 도가 있다면요?

“어려운 질문인데. 성경에 ‘하나님 가라사대’, 불전에는 ‘여시아문(如是我聞)’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들었노라’라고 돼있잖아요? 그러니까 김 선생이 들은 대로 쓰시오. 하하.”

여시아문, 이근후 가라사대 “과거에 대한 집착, 오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버리면 지금, 여기의 행복이 보인다네. 원치 않은 직장에 다니고 있는가. 아니면 그마저도 구하지 못했는가. 나이가 들어 몸이 예전 같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생긴 소소한 재미나 행복은 없나. 아마 분명히 있을 거네. 그걸 야금야금 찾으며, 누리며 살면 된다네. 최선 따윈 필요 없고, 차선으로 말이네” 하였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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