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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챔스 정상 이끈 클롭 감독
트레이닝 복 차림 덥수룩한 수염… 부임하며 “마법 못 부려” 말하더니
명문 이름만 남은 팀 서서히 부활시켜 ‘비틀스의 도시’에 14년 만의 환호
위르겐 클롭 감독이 2일 스페인 마드리드의 완다 메트로폴리타노에서 열린 리버풀과의 2018~19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승리한 뒤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마드리드=EPA 연합뉴스

“나는 마법을 부릴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노멀 원(the normal one)에 가깝다.”

4년 전 리버풀 부임 첫 기자회견에서 자신에게 기적을 기대하지 말라던 위르겐 클롭(52ㆍ독일) 감독이 기적을 일으켰다. 가는 팀마다 우승을 차지했던 조제 무리뉴(56ㆍ포르투갈) 감독의 별명 ‘스페셜 원(the special one)’에 빗댄 유머였지만, 뼈 있는 농담이었다. 리버풀은 지난 4년 동안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강팀으로 변모했고 결국 세계 최고의 팀이 됐다. 그야말로 ‘보통’ 남자의 ‘특별한’ 승리다.

리버풀은 2일(한국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의 완다 메트로폴리타노에서 열린 2018~19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토트넘을 2-0으로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리버풀은 경기 시작 48초 만에 얻어낸 페널티킥을 전반 2분 모하메드 살라(27ㆍ이집트)가 골로 연결하며 이른 시간 1-0으로 승기를 잡았다. 경기 중반 토트넘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다 후반 32분 디보크 오리기(24ㆍ벨기에)가 추가골을 터트리며 ‘이스탄불의 기적’ 이후 14년 만에 유럽 정상에 올랐다. ‘명문’이라는 껍데기만 남았던 리버풀이 다시 한 번 최고의 팀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리버풀은 잉글랜드 축구의 오랜 명문이지만 클롭 부임 당시의 상황은 암울했다. 1892년 창단해 18번이나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프리미어리그 출범(1992년) 이후 단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며 자랑할 게 역사만 남았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리버풀이 클롭을 선택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는 2008년 슬럼프에 빠져 있던 독일 분데스리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사령탑에 부임해 두 번의 정규리그 우승과 한 번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을 이끌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최전방부터 강력한 압박을 펼치는 ‘게겐프레싱’의 선두 주자였다. 리버풀이 영국 축구의 오랜 라이벌인 독일 지도자를 받아들인 건 127년 구단 역사상 처음이었다.

리버풀과 토트넘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린 2일 영국 리버풀의 리버풀 팬들이 위르겐 클롭 감독이 그려진 벽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리버풀=로이터 연합뉴스

클롭 감독은 취임 기자회견부터 리버풀 팬들을 매료시켰다. 자신을 ‘노멀 원’이라 낮추며, “4년 안에 우승 못하면 리버풀을 떠나겠다”고 한 뒤 시간을 준다면 리버풀을 부활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첫 시즌 리그컵과 UEFA 유로파리그 결승에서 아쉽게 패하며 무관에 그쳤지만 겸손한 클롭 감독을 향한 지지는 굳건했다. 북아일랜드 언론 아이리쉬 이그재미너는 당시 “리버풀은 이미 클롭의 매력과 카리스마에 흠뻑 빠졌다”고 보도했다.

클롭은 팬들의 신뢰에 보답하듯 리버풀에 변화를 몰고 왔다. 다른 감독들처럼 잘 차려진 수트 대신 덥수룩한 수염에 검은 색 야구모자를 쓴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열정적으로 경기를 지휘했고, 선수들과 격의 없이 지냈다. 영국 골닷컴은 그에게 ‘과격한 게르만 남자’라는 별명을 붙이며 리버풀에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전했다.

클롭 감독은 2016년 기자회견 때 전설적인 록 밴드 비틀스 티셔츠를 입고 나오기도 했다. 리버풀은 비틀스의 고향이다. 팬들이 클롭 감독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영국 스포츠 전문 매체 유로스포르트는 “클롭은 비틀스의 다섯 번째 멤버”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클롭이 지휘봉을 잡은 지난 4시즌 동안 경기력도 180도 달라졌다. 살라와 버질 반 다이크(28ㆍ네덜란드), 로베르토 피르미누(28ㆍ브라질) 등이 대표적이다. 2017년 여름 리버풀에 합류한 살라는 EPL 2년 연속 득점왕에 오르며 세계 최고 공격수 반열에 올랐다. 이적료 7,000만파운드(약 1050억원)에 영입한 반 다이크는 과도한 몸값을 지불한 것 아니냐는 논란에도 EPL 최고 수비수로 성장했다. 브랜든 로저스(46ㆍ아일랜드) 감독 시절 측면 공격수로 뛰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피르미누는 중앙 공격수로 옮겨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맹활약을 펼쳤다.

그런 클롭에게 이날 결승전은 지난 4년의 결실을 맺는 특별한 밤이었다. 클롭은 골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사실 경기가 20분 정도 지났을 즈음에 소변을 반쯤 지렸다”며 “물도 못마셨다”고 고백했다. 도르트문트 시절부터 이어져온 자신의 토너먼트 결승전 6연패 기록을 깨며, 4년 안에 우승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제임스 밀너(33ㆍ잉글랜드)와 주장 조던 헨더슨(29ㆍ잉글랜드) 등 선수들에게 공을 돌렸다. 클롭은 “나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 팀 내 고참인 밀너의 드레싱룸 대화가 없었다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며 “2019년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의 주장 헨더슨의 리더십도 뛰어났다”고 치켜세웠다.

클롭은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으면서 연신 미소를 머금었다. 경기장에는 마드리드까지 원정 온 리버풀 팬들이 부르는 응원가 ‘You’ll never walk alone(그대는 결코 혼자 걷지 않으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은 아마도 내 생애 최고의 밤이지 않나 싶다. 하지만 리버풀의 축구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리버풀 선수들이 2일 스페인 마드리드 완다 메트로폴리타노에서 열린 2018~19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토트넘에 2-0으로 승리한 뒤 위르겐 클롭 감독을 헹가래하고 있다. 마드리드=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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