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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수피주의자들의 반외세 운동과 리비아 국민 영웅 우마르 알무크타르 
 
 ※이슬람 국가 모로코에서 이슬람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정명 명지대 교수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리비아의 국민적 영웅 우마르 알무크타르는 ‘사막의 라이온’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했다. 안소니퀸이 우마르 알무크타르를 연기한 영화 ‘사막의 라이온’(1981)의 포스터.

근대의 시작과 함께 이슬람 세계는 유럽 열강에 의한 식민지 쟁탈전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에 맞서 이슬람 각 지역에서는 독립을 위한 항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슬람 세계에서 외세에 맞서 가장 적극적으로 독립투쟁을 벌였던 이들은 수피주의자들이었다. 흔히 비폭력과 평화적 공존의 가치를 강조하고 속세를 떠나 은둔의 삶을 영위했던 수피주의자들이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유럽의 군대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특히 이탈리아의 침략에 맞선 항쟁을 주도했던 우마르 알무크타르는 리비아 최대 수피 조직이었던 사누시야 종단의 지도자였다. ‘사막의 라이온’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던 그는 아직도 리비아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유럽의 이슬람 세계 식민지화와 수피종단의 저항 운동 

19세기 초 이슬람 세계는 유럽 열강에 의한 식민지 쟁탈전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1830년 알제리, 1881년 튀니지, 1912년 모로코를 차례를 식민지로 삼았다. 한편 영국은 1801년 이집트에서 프랑스 군대를 축출한 뒤 이집트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다가 1882년 마침내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집트를 손에 넣은 영국은 이곳을 거점으로 남쪽으로 진출해 1889년에 수단마저 식민지로 삼았다. 그리고 이탈리아 역시 1911년 리비아를 침략하여 식민지 쟁탈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유럽 열강에 의한 식민지화는 무슬림들에게 깊은 상처와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이들은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최첨단 무기를 갖춘 유럽 군대에 저항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선두에 섰던 집단은 수피주의자들이었다. 수피주의자들이 유럽 열강의 식민주의 확장에 맞서 군사 저항 운동을 전개한 사례는 이슬람 지역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세네갈, 기니아, 말리 등을 포함한 서아프리카 지역에서는 티자니야 종단이 프랑스에 대항했고, 동아프리카의 소말리랜드에서는 살리히 셰이크 무함마드가 이끄는 수피종단이 이탈리아와 영국에 맞섰다. 알제리에서는 카디리야 종단의 지도자 압드 알카디르가 1830년부터 1847년까지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 투쟁을 벌였다. 한편 중앙아시아에서는 낙쉬반디야 종단이 러시아에 맞서 30년 동안 저항을 지속했다.

수피주의(Sufism)는 신과의 영적 합일을 통해 몰아(沒我)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추구한다. 전통적으로 수피주의자들은 속세의 욕심으로부터 초탈하고, 모든 것을 신에게 의탁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물질적 소유를 멀리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수피주의자들은 수도원 생활에 전념하는 은둔적인 삶을 중요시 여겼다. 그러나 이들은 이슬람 세계가 와해되는 역사적 위기를 맞이하자 반외세 저항 운동에 적극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기 시작했다.

 ◇‘사막의 라이온’ 우마르 무크타르, 이탈리아에 맞서다 
우마르 알무크타르와 사누시야 종단의 기병대.

20세기 초 수피주의자들이 반외세 저항 운동에 참여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리비아의 사누시야 종단이었다. 사누시야 종단의 반외세 항쟁은 19011년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유럽 국가 가운데 비교적 약체에 속했던 이탈리아는 분열로 찌든 국가를 단합시키고 어엿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리비아를 정복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리비아의 종주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병자(病者)’라고 불릴 정도로 허약했고, 이탈리아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손쉽게 리비아를 접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전혀 뜻밖의 복병을 만났다. 리비아의 대표적인 수피 조직이었던 사누시야 종단이 결사 항전에 나선 것이다. 이탈리아가 침공을 시작한 1911년부터 사누시야 종단은 리비아의 독립 운동을 주도했고, 이들의 끈질긴 저항은 1931년까지 지속되었다.

엄청난 군사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누시야 종단이 이탈리아에 맞서 무려 20년 동안 항쟁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우마르 알무크타르와 같은 탁월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마르는 오늘날까지도 리비아뿐만 아니라 전 아랍세계에서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는 인물로서, 1981년에 제작된 영화 ‘사막의 라이온(Lion Of The Desert)’에서 명배우 안소니 퀸이 주인공인 그의 역할을 맡으면서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다.

원래 우마르는 사누시야 종단 소속의 평범한 코란 학교 선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탈리아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과감히 군 지휘관으로 변신하여 각 지역의 부족민을 규합한 뒤 ‘무하피지야’라고 불리는 소규모의 기동력을 갖춘 부대를 편성했다. 우마르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이탈리아에 대항하기 위해 사막의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했다. 그가 이끈 부대는 사막의 모래 속에 매복하고 있다가 이탈리아군의 기지를 기습하거나 보급로와 통신선을 차단하는 등 게릴라 식 공격을 감행했다. 사막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이탈리아군은 그의 신출귀몰한 작전에 말려 번번이 패할 수밖에 없었다.

사누시야 종단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항전한 리비아의 국민 영웅 우마르 알무크타르.

우마르가 치고 빠지는 게릴라식 전법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무엇보다도 사하라 사막 전역에 퍼져 있었던 사누시야 종단의 방대한 수도원 조직망 덕분이었다. 리비아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수피 성인(聖人)을 숭배하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수피 성인은 신과 소통이 가능한 비범한 인물로서 ‘바라카’라고 불리는 신의 은총을 불러올 수 있다고 여겨졌다. 수피 성인이 지녔던 특별한 능력은 죽은 후에도 남아있다고 생각되어 그의 시신을 모신 묘를 중심으로 ‘자위야’라고 불리는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자위야는 모스크와 구분되는 수피주의자들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특히 북아프리카 지역의 경우 모스크가 공식적인 교리와 율법을 가르치는 역할을 담당했다면, 자위야는 수피 성인으로부터 신의 은총을 받기를 원하는 대중들 사이에서 기복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자위야는 대중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부족 간 분쟁을 중재하며, 공동 소유의 토지를 인근 주민과 함께 경작하고 농작물을 공동 분배하는 협동조합의 역할도 수행했다. 이 때문에 자위야는 가난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소외된 무슬림들이 많이 사는 농촌, 시골, 사막 지역에서 빠르게 조직망이 확산될 수 있었다.

리비아에서 사누시야 종단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중반 무렵이었는데, 반세기 만에 이 종단의 자위야는 사막 루트를 따라 이집트, 수단, 차드 등 아프리카 전역으로 확대되어 그 수가 약 146개에 달했다. 우마르는 사누시야 종단의 광범위한 자위야 조직망을 통해 사하라 사막 각 지역의 정보를 신속하게 수집할 수 있었고, 반외세 저항운동에 필요한 인력, 물자, 무기, 식량 등을 쉽게 조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는데 필요한 은신처도 어렵지 않게 확보할 수도 있었다.

 ◇이탈리아의 초토화 작전과 서구 열강의 만행 
이탈리아군에 의해 생포된 후 처형당하기 직전 우마르 알무크타르의 모습.

1930년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은 리비아 주둔군 신임 사령관으로 그라치아니 장군을 임명했다. 그라치아니는 우마르가 지휘하는 리비아 저항군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근거지인 자위야와 그 주변에 사는 마을 주민 간의 접촉을 차단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마을 우물을 폐쇄하고 가축을 도륙한 뒤 마을 주민 전체를 강제 수용소에 보내거나 학살하는 잔혹한 초토화 작전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양민이 수용소에 감금되거나 학살되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대략 16개의 수용소에 약 11만 명이 강제로 감금되었고 그 가운데 최소한 4만 명에서 최대 7만 명이 질병, 학대, 굶주림 등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마르가 이끄는 저항군은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식량 공급이 차단되어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탄약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1931년 9월 11일 우마르는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이탈리아군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닷새 후인 9월 16일 그는 공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죽음과 함께 사누시야 종단의 이탈리아에 대한 항쟁은 막을 내렸고, 리비아는 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탈리아의 식민지로 남게 되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이슬람 세계의 식민지화 역사 과정을 보다 보면 이 말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리비아뿐만 아니라 이슬람 세계 각지에서는 서구 열강에 의해 토지 몰수와 경제적 수탈이 자행되었고 독립 투쟁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당시 서구 식민지 당국이 저지른 만행과 피해를 당한 무슬림 양민의 고통은 현재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잊혀진 과거가 되었다.

김정명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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