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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벌벌 떨었던 의열단장 김원봉… 1958년 북한서 종적 감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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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은 일본이 가장 두려워한 조선의 독립운동가였다. 말보다 행동으로 하는 독립운동을 선호했다. 일제가 내건 그의 현상금(8만엔)은 김구의 현상금(5만엔)보다 높았다.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밀양공립보통학교시절 일본 국경일인 천장절(일왕 생일)에 일장기를 변기에 버리고 학교를 떠났다. 1916년 중국으로 건너간 이후 3ㆍ1운동이 일제의 총칼에 진압당하는 것에 절망해 항일 비밀 결사 조직인 의열단(義烈團)을 만들었다. 21세 때였다. 의열단은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뜻이다. 권총과 폭탄으로 무장한 의열단은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를 겨눴다. 종로ㆍ부산ㆍ밀양 경찰서와 조선 총독부 폭파 사건, 도쿄 황궁 니주바시교 폭파 사건 등이 의열단의 대표적인 활동이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약산 김원봉 평전’에서 “일제 군경과 관리들에게 의열단원은 염라대왕과 같은 존재였다”고 썼다.
김원봉은 이후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무장 독립 운동을 이어 갔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우리가 선구자가 되어 민중을 각성시켜야 한다.” 의열단원에게 김원봉이 강조한 말이다. 민족의 하나된 해방을 꿈 꾼 김원봉은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의 이념 대립과 남북 분단이라는 격랑에 휩쓸렸고, 1948년 월북으로 역사에서 지워졌다. 김일성 체제에서 고위직을 역임한 그는 1958년 6월 마지막 공개 활동 이후 각종 기록에서도 자취를 감추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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