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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종교를 초월한 시칠리아 국제 지식 네트워크
 ※ 이슬람 국가 모로코에서 이슬람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정명 명지대 교수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매주 들려드립니다.   
알이드리시 세계지도의 라틴어 사본. 오른쪽 아래 빨간색으로 표시한 6개의 섬에 라틴어로 ‘신라’라고 표기되어 있다. 알이드리시 지도는 남쪽이 위로 북쪽이 아래로 그려져 있다. 위 사진처럼 거꾸로 뒤집어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지도와 위치가 같아 보인다.

이탈리아 남부에 위치한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 시칠리아. 오늘날 이곳의 푸른 바다빛은 수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끌어 모으고 있다. 11~12세기 무렵에도 시칠리아는 지중해 전역에서 모여든 여행가, 지식인, 예술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이들을 시칠리아로 불러들였던 것은 노르만 통치자들의 종교를 초월한 관용과 배려의 정책이었다. 유럽 곳곳이 십자군의 광풍에 휩싸였지만, 시칠리아에서만큼은 그리스도교 군주가 아랍어 서예로 장식한 망토를 입거나 이슬람 양식으로 교회 건축물을 짓는 것은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12세기 무렵 무슬림 지리학자였던 알이드리시가 그리스도교 군주의 명령으로 ‘신라(新羅)’의 지명이 표기된 세계지도를 제작한 곳도 다름 아닌 시칠리아였다.

정복자가 바뀌어도 피정복민 존중

중세기간 동안 시칠리아는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문화가 교류하는데 가장 중요한 중심지 역할을 했다. 바로 이곳에서 이슬람 세계의 과학과 철학 서적이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무슬림 학자와 그리스도교 학자가 자유롭게 토론하고 새로운 정보를 교환했다. 이처럼 시칠리아가 문화 교류의 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변 강대국들이 지중해 패권 장악을 위해 차례로 이 섬을 정복했고, 그 와중에서도 피정복민의 기본 권리를 존중하는 관용 정책을 일종의 묵계처럼 지켰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시칠리아는 6세기부터 12세기까지 정복자가 세 번 바뀌는 우여곡절을 거쳤다. 6세기 초반 비잔티움 제국은 이탈리아 공략을 위한 전초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시칠리아를 정복했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인들은 세련된 비잔티움의 예술과 문화를 시칠리아에 들여왔다. 9세기 초부터 11세기까지 시칠리아는 북아프리카의 아글랍조와 파티마조에 잇달아 정복되면서 통치자가 무슬림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무슬림 통치자들은 피정복민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했고, 그 덕분에 이 섬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인과 유대인은 자신들의 언어, 문화,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무슬림 통치자들의 이민족을 배려한 관용 정책 덕분에 11세기 무렵 시칠리아의 수도 팔레르모는 인구 35만명이 넘는,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로 성장할 수 있었다.

1091년 북유럽 출신의 노르만족이 시칠리아를 정복함으로써 이 섬은 주인이 다시 한 번 바뀌는 운명에 처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새로운 정복자는 피정복민의 문화를 존중하는 관용 정책만큼은 그대로 유지했다. 노르만 통치자들은 피정복민으로 전락한 그리스인과 아랍인을 강제적으로 개종 또는 동화시키기보다는 나름대로의 고유한 생활 방식을 그대로 누리도록 허용했다. 이처럼 시칠리아는 수세기에 걸쳐 정복자가 비잔티움에서 아랍‧무슬림으로 그리고 다시 노르만족으로 바뀌는 정치적 격변을 겪었지만, 신기하게도 피정복민에 대한 관용 정책만큼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시칠리아의 그리스도교 군주, 무슬림의 존경과 칭송을 받다
그리스도로부터 왕관을 수여 받는 루지에로 2세를 묘사한 모자이크화

시칠리아에서 다양한 민족 간 공존과 융합이 만개했던 시기는 노르만족의 통치 시절이었던 11~12세기 무렵이다. 노르만 통치자들 가운데서도 이민족에 대한 관용의 표본으로 가장 널리 칭송되는 인물은 루지에로 2세(1130~1154 재위)였다. 그가 통치했던 12세기는 유럽에서 십자군 전쟁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던 때였다. 하지만 루지에로 2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무슬림 주민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택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이슬람 문화를 배우고 아랍어를 익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호위하는 중책을 맡은 보병 시위대에도 과감히 아랍인과 무슬림을 발탁했다.

야자수와 사자가 동물을 사냥하는 모습이 새겨진 루지에로 2세의 대관식 망토

루지에로 2세가 아랍인과 무슬림을 포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그가 대관식에서 입기 위해 제작한 망토에서도 엿볼 수 있다. 빨간색 실크로 만든 천에 금실과 각종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대관식 망토는 루지에로 2세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한동안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이 권좌에 오를 때마다 한 번씩 걸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망토의 문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럽과 이슬람 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앙에 새겨진 야자수는 사막에 살았던 아랍인들에게 생명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던 것이고, 양 옆에 배치된 사자가 동물을 사냥하는 그림은 고대 페르시아 시절부터 중근동 지역에서 황제의 권위를 나타낼 때 즐겨 사용했던 상징이었다. 더욱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망토 밑자락에 띠 모양으로 새겨진 아랍어 서예 장식인데, 여기에는 이 망토가 시칠리아의 왕실 공방에서 이슬람력 528년(서기 1133~1134년 경)에 제작되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루지에로 2세는 이 망토를 걸침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교도뿐만 아니라 무슬림을 포함한 모든 시칠리아 사람들을 위한 통치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루지에로 2세의 대관식 망토 밑자락에 새겨진 아랍어 서예 장식

12세기 초 수도 팔레르모에 건축된 카펠라 팔라티나 예배당 역시 다양한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던 루지에로 2세의 포용 정책을 잘 보여주고 있다. 카펠라 팔라티나는 중세 시칠리아 교회 건축물의 백미로 꼽히는데, 독특한 점은 촛대와 설교단은 노르만 양식으로, 돔과 성화(聖畵)는 비잔티움 양식으로, 아치와 천장은 이슬람 양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마치 박물관을 연상시키듯 노르만, 비잔티움, 이슬람식 건축 양식을 모두 한 공간에 섞어 놓은 것이다. 특히 천장에는 북아프리카나 안달루시아에서 즐겨 사용되었던 ‘무카르나스’라는 벌집 모양의 이슬람 건축 기법이 사용되었고, 기하학적 형태의 아라베스크 문양과 아랍어 서예 글씨가 장식으로 추가 되었다. 천장만 올려다보면 그리스도교 예배당이 아니라 이슬람 모스크라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카펠라 팔라티나 예배당

루지에로 2세의 관용 정책은 후대에 무슬림들에 의해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중세 아랍 역사학자 이븐 아시르는 그가 십자군 전쟁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무슬림을 우대했던 것을 기리며, “무슬림들은 친절한 대우를 받았고 심지어 프랑크족(십자군)의 위협으로부터도 보호를 받았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루지에르 왕을 매우 사랑했다”고 존경을 표했다. 루지에로 2세 이후에도 노르만 군주들의 무슬림에 대한 관용적인 정책은 계속 유지되었다. 1185년경 시칠리아를 방문했던 아랍 여행가 이븐 주바이르는 노르만 통치 시절임에도 모스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남아 있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노르만 군주의 무슬림에 대한 태도는 완벽하다. 그는 무슬림들에게 직업을 주고 그들 가운데서 관료를 발탁하기도 한다. 거의 모든 무슬림은 계속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 군주는 무슬림들을 완전히 신뢰하여 중책을 맡기기도 한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랍인 지도학자가 ‘신라’를 표기한 세계지도 제작

루지에로 2세가 통치했던 12세기 무렵 시칠리아에서 이뤄진 또 하나의 업적은 신라의 지명이 표기된 세계지도의 완성이었다. 세계 각지의 문물에 호기심이 많았던 루지에로 2세는 지중해뿐만 아니라 멀리 아시아 지역까지도 상세하게 보여줄 수 있는 지도를 제작하는데 관심이 높았다. 때 마침 그는 유럽 전역과 북아프리카를 여행했던 안달루시아 출신의 아랍 지리학자 알이드리시가 메카로의 성지순례를 마친 후 그리스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곧바로 알이드리시를 팔레르모의 궁전으로 초대하여 세계지도 제작과 인문지리서 편찬을 의뢰했다.

아랍에미리트 샤르자 이슬람문명박물관에 전시된 알이드리시 세계지도 아랍어 사본. 왼쪽 빨간색으로 표시한 6개의 섬에 아랍어로 ‘신라’라고 표기되어 있다. 필자 촬영

루지에로 2세는 알이드리시가 당대 최고의 세계지도를 제작할 수 있도록 그리스, 로마, 아랍 등 세계 각지에서 저술된 고전 지리학서를 모두 수집해 줬을 뿐만 아니라, 지리학자, 천문학자, 화가 등으로 구성된 전문가 팀을 세계 각지에 파견하여 자료를 모으도록 했다. 그 덕에 알이드리시는 1154년경 ‘극지 횡단 모험가의 산책’의 저술을 마칠 수 있었다. 이 지리서에는 1매의 세계지도와 70매의 지역 세분도가 삽입되어 있는데, 제1지역 세분도의 중국 동쪽 해상에 아랍어로 ‘신라’로 표기한 여섯 개의 섬이 그려져 있다. 알이드리시의 세계지도는 한자 문명권 이외 지역에서 우리나라의 지명이 표기된 최초의 지도로 추정되고 있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 같은 세계지도가 12세기 중반 시칠리아 섬에서 무슬림 지리학자에 의해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루지에로 2세의 지속적인 관용과 배려 정책은 각 분야의 인재를 시칠리아로 불러들였고, 이를 계기로 종교와 문화를 초월한 광범위한 국제 지식 네트워크가 활발히 가동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김정명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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