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지출 필요하면 돈 찍어라" 미국 학계 달구는 현대화폐이론

입력
2019.03.12 04:40
수정
2019.03.12 07:2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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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파월(왼쪽)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과 현대화폐이론(MMT)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경제학자인 스테파니 켈턴 스토니브룩대 경제학 교수.
제롬 파월(왼쪽)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과 현대화폐이론(MMT)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경제학자인 스테파니 켈턴 스토니브룩대 경제학 교수.

미국 경제학계와 금융가가 현대화폐이론(Modern Monetary TheoryㆍMMT)을 둘러싸고 들끓고 있다. 정부의 재정적자를 적대시하고 물가 안정을 위한 통화긴축 정책을 선호해온 주류 경제학에 맞서, MMT는 “정부는 균형 재정에 연연할 필요가 없으며 필요하다면 돈이나 국채를 발행하면 된다”는 도발적 주장을 내놓고 있다.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MMT는 나름의 이론적 근거에 정치적 파급력까지 갖추면서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완전고용을 위해 돈을 찍어라”

10일 블룸버그통신 등 해외 언론에 따르면, 기존 경제이론과 차별화되는 MMT의 핵심적 특징은 ‘정부 지출은 세수를 넘어설 수 없다’는 철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화폐에 대한 MMT 고유의 관점에서 비롯한다. 기존 경제학이 화폐를 시장에서 가치 교환을 효율화하기 위해 도입한 것으로 본다면 MMT는 화폐를 정부가 조세를 거둬들이기 위해 발행한 것으로 본다. 애초 화폐는 정부의 강제력에 기반하는 만큼 정부가 얼마든지 발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MMT 관점에서 정부, 특히 미국ㆍ영국ㆍ일본 등 화폐 발행에 자율성이 강한 국가의 정부는 재정적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돈을 발행해 부채를 갚으면 되기 때문이다. MMT 진영은 또 과다한 고용이 물가 상승을 유발할 수 있다는 관점을 거부하고 오히려 정부가 침체기에 수요를 유발하는 차원에서 ‘고용 보장’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MMT가 정부에 무차별적인 지출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재정ㆍ통화정책은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는 경제학의 금과옥조를 전복하는 입장인 것은 분명하다.

월가에도 MMT 동조론이 상당하다. 미국 정부부채가 급증했음에도 그간 국채금리는 3% 아래에 머물며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은 MMT의 주요 지지 근거다. 금융투자사 핌코의 수석경제학자 출신인 폴 매컬리 코넬대 로스쿨 교수는 “기존의 경제학은 (통화량 제한을 중시하는)금본위제의 유산이 남아있어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며 MMT의 편을 들었다. 다만 “의회와 정부가 모든 경제정책을 통제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는 만큼, 연방준비제도(연준ㆍ통화정책)과 정부(재정정책)의 정책적 균형과 협력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반면 학계는 MMT 비판론이 우세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재정적자를 늘리면 결국 연준이 물가상승 방지를 위해 기준금리를 인상할 수밖에 없다”며 “MMT는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상충을 무시한다”고 비판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로런스 서머스 역시 워싱턴포스트 기고에 ‘미신 경제학’이라는 표현을 동원하며 “진보 진영이 MMT를 끌어안는 것은 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롬 파월 연준의장은 지난달 26일 “국가채무를 발권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은 옳지 못하다”고 우회적으로 MMT에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저작권 한국일보]현대화폐이론_신동준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현대화폐이론_신동준 기자

◇MMT로 트럼프 잡겠다는 민주당

그럼에도 MMT는 ‘대안적 경제이론’을 넘어 ‘정치적 레토릭’으로 부상한 상황이다. 특히 미국 민주당에선 MMT를 추종하는 좌파 진영이 기세를 올리고 있다. 이들은 2020년 대선에서 ‘비주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맞서기 위해서는 ‘비주류적 대안’으로 맞불을 놔야 한다는 입장이다. 2016년 대선 당시 MMT 진영의 대표 학자인 스테파니 켈턴 스토니브룩대 교수를 경제 수석 고문으로 채용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비롯해 주요 대선 후보들이 MMT식 ‘일자리 보장’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크루그먼ㆍ서머스의 비판을 두고도 이들이 재정 적자에 온건한 입장을 취해 온 민주당 성향 경제학자라는 점을 지적하며 “민주당 중도층의 좌파 진영에 대한 반격”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바로 ‘MMT의 신봉자’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는 대선후보 시절부터 “미국 정부는 화폐를 찍어내는 입장이니 채무불이행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대규모 감세와 경기부양 정책을 병행하고 있다. 집권 이후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적자는 크게 불어나고 있지만 트럼프는 올해 국정연설에서도 재정적자나 부채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트럼프 정부의 경제정책이 MMT 이론에 기반한 것은 아닐지라도 집행 방식은 유사하다는 시각은 MMT 진영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경제학자 워런 모슬러는 “트럼프 정책은 일자리 보장을 통한 불평등 해소라는 MMT의 목표와 거리가 멀지만, 양측 모두 재정 부양책을 쓰는 것은 매한가지”라고 밝혔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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