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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노인만 있는 공간, 노인도 있는 공간

입력
2019.03.08 04:40
31면

경로당은 우리 도시에 있는 대표적인 노인을 위한 공간이다. 집과 가까운 곳에 있고, 또래와 함께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경로당은 오랫동안 동네 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고령사회를 맞아 노인의 수가 늘어나니 경로당이 전성기를 누릴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사가 잦고, 주거 공간과 경제활동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대도시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평생 직장생활을 하던 노인이 갑자기 마을 노인의 일원이 되어 같이 밥 해먹고 수다 떨기란 쉽지 않다. 노인의 연령 폭이 넓어지면서 70세 정도는 어린애 취급을 받고, 텃세가 있는 경우도 많고, 나이가 많고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 이외의 공통점을 미리 알 수 없는 조직에 발을 담근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모여서 뭔가를 하는 곳’인 경로당을 찾는 노인은 줄어들지만 ‘뭔가를 하기 위해 모이는 곳’을 찾는 노인은 많아졌다. 노인복지관은 각종 학습프로그램, 노래교실, 노인자원봉사 등을 하기 위해 모여든 노인으로 북적댄다. 노인 전용 콜라텍, 노인 전용 극장도 늘어간다. 하지만 노인들은 ‘노인만의 공간’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기존에는 젊은이들의 공간으로 여겨졌던 곳에 노인이 점점 늘어난다. 낯선 무리가 늘어나면, 원래 그곳을 주로 이용하던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내가 자주 가는 도서관에는 최근 몇 년 사이 노인 수가 급증했다. 신문을 보는 곳은 거의 다 노인들의 차지이고, 종합자료실의 책상에도 대부분 노인이 앉아 있다. 그들은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해, 예전 같으면 여유있게 자료를 찾아서 볼 수 있는 오전시간에도 자료를 보려면 노인들 사이의 빈 틈을 찾아야 앉을 수 있다.

어느날인가는 그렇게 간신히 빈틈을 찾아 앉아있는데, 내 뒷자리의 노인은 신문을 큰소리로 넘겼고, 어떤 노인은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고, 계속 헛기침을 하는 노인도 있었다. 그날 따라 노인들이 더 신경쓰였다. 내 앞자리에 앉은 노인은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언젠가는 내 입으로 들어갈지도 모르는 침을 정성스레 바르고 있었다. 나는 그 ‘노인들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도서관을 나와버렸다.

그날 저녁, 난 그 도서관에서 하는 강좌프로그램을 들었는데, 그곳에도 많은 노인이 와서 깜짝 놀랐다.(당시 강좌의 주제는 과학이었다!) 많은 수의 노인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노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인지 그 분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 것이 이상하거나 어색하지는 않았다. 함께 수업을 들었던 노인들은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강좌에 임했다. 많은 나이에도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그들의 모습은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오전에 있었던 노인들이 떠올랐다.

내 생각의 오류는 만약 어떤 젊은 사람이 그런 일을 했다면 그 개인의 일탈로 치부했을 일을, 노인의 행동을 보고는 ‘노인층’의 문제로 생각했다는 점에 있었다. 생각해보면, 도서관에서 전화를 받거나, 헛기침을 해대는 젊은 사람도 많이 있다. 나와 다르고 교류가 없었던 무리의 등장은 경계심을 주고, 개인을 너무도 쉽게 집단으로 판단하게 만든다.

노인을 위한 공간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뜻이 노인만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난 세상을 살면서 노인들과 함께 공부하고, 의견을 나누고, 도움을 받았던 좋은 기억이 있다.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난 노인이 다른 세대와 좀 더 잘 어울렸으면 좋겠다. 젊은이들도 노인들과 잘 어울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서로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질 수 있는 역량과 경험을 키워내는 것이 노인정책으로도, 공간으로도 나타났으면 좋겠다. 최소한 22년 안에는. 아무래도 난 경로당에 갈 것 같지는 않다.

최성용 도시생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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