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2막!] “퇴직자 돈 잘 지키기, 우리만한 베테랑 있나요?”

입력
2019.03.06 04:40
16면
구독

 <1>금융권 퇴직자 15명이 만든 ‘다우리이엔씨협동조합’ 

※ 은퇴 이후 하루하루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삶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은퇴 후 삶은 어때야 하는 걸까요. <한국일보>는 우아하고 품격 있게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한국은행에서 31년간 근무한 김석종 전 다우리이엔씨협동조합 이사장이 지난달 23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세미나실에서 한 초등학생의 질문을 듣고 있다. 이한호 기자
한국은행에서 31년간 근무한 김석종 전 다우리이엔씨협동조합 이사장이 지난달 23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세미나실에서 한 초등학생의 질문을 듣고 있다. 이한호 기자

“우리나라에서도 은행이 어려울 때가 있었어요. 언제인지 아는 사람?”

“IMF 때요!”

“사탕 하나 줘야겠네.”

한 노신사가 막대사탕 하나를 앞줄에 앉은 어린이에게 건넸다. 지난달 23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1층 세미나실. 개학을 앞두고 견학을 온 어린이 17명의 시선이 김석종(71)씨에게로 쏠려있다. “IMF는 국제통화기금이라는 국제기구 이름이고요. 정확하게는 1997년 외환위기 때라고 해야 해요.” 한국은행에서 30년 넘게 근무한 그가 초등학생에게 ‘금리는 왜 오르고 내릴까요’라는 주제로 강의 중이다. “여러분, 화폐가 뭐죠? 돈이에요.” “GDP(국내총생산) 들어본 적 있나요?” 채 20분을 집중하기 힘든 어린이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애를 쓴다. 앞 줄에 앉은 일부는 제법 진지하게 김씨의 말을 수첩에 적어가면서 듣고 있다.

31년간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나들던 한국은행에 그가 다시 발을 들인 것은 2015년 4월부터다. 퇴직 후 새 인생을 모색하던 2014년, 은행과 증권사, 보험사 출신의 금융 분야 베테랑이 뭉쳐 다우리이엔씨협동조합을 설립하면서였다. 초대 이사장을 지낸 김씨와 역시 한국은행을 다니다 퇴직한 이재헌(66)씨, SC제일은행 지점장 출신 김정신(63)씨 등 금융권 퇴직자 15명이 “우리가 갖고 있는 금융지식을 전달하면서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고, 은퇴 이후 일거리도 찾아보자”고 뜻을 모은 결과다. 다우리이엔씨협동조합은 청소년 등 미래세대를 위한 금융경제 교육과 금융소외 계층을 위한 재무상담 등 사회공헌활동을 주로 한다. 매달 둘째, 넷째 주 토요일마다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에서 여는 경제강좌도 그 일환이다.

“은퇴하고 보니 두 번째 직업이 필요하더라고요. 그게 뭐든 일을 통해 성취와 보람을 느껴야 정신적ㆍ육체적 안정도 따라오고요.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가 쌓은 걸 사회에 환원하는 취지도 좋고요. 저희 조합이 유지되고 있는 원동력입니다.” 현재 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재헌씨 말이다.

어느덧 100세 시대다. 준비 없이 열려버렸다. 직장에서 은퇴하면 자연스레 인생에서도 은퇴하던 시대를 빠르게 지나 남은 생애만 30~40년에 이른다. 전체 인생에서 3분의 1쯤 해당한다. 장수(長壽)가 재앙이 되어버린 한국에서 중년 이후의 존엄한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재헌 다우리이엔씨협동조합 이사장이 2017년 서울 동성중 경제금융동아리 학생들을 대상으로 ‘생애설계 해보기’ 실습을 지도하고 있다. 다우리이엔씨협동조합 제공
이재헌 다우리이엔씨협동조합 이사장이 2017년 서울 동성중 경제금융동아리 학생들을 대상으로 ‘생애설계 해보기’ 실습을 지도하고 있다. 다우리이엔씨협동조합 제공

 ◇경험 나누는 시니어전문가 ‘더불어 행복하기’ 

‘더불어 행복하기^^’. 이씨의 사회관계망서비스 ‘카카오톡’ 상태메시지에 적힌 문구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조합 생각뿐이다. 다함께라는 뜻의 ‘다우리’를 조합 이름에 넣을 정도로 더불어 함께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퇴직을 앞두고 있는 베이비부머나 시니어를 위한 재무상담도 그런 차원이다. 보통 돈 벌기와 쓰기, 모으기, 빌리기, 기부하기 등 소위 ‘5기’를 중심으로 교육하는데 조합은 여기다 ‘돈 잘 지키기’를 추가한 ‘6기’를 알리고 있다. 이씨는 “젊어서야 실패도 장차 경험이 되지만 퇴직자는 사기를 당하거나 돈을 한번 날리면 다시 일어설 수가 없다”며 “금융소외계층에 대한 재무상담 교육이 꼭 필요한 이유다”고 말했다.

준비 없이 노후를 맞는 과오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미래 세대에 대한 금융교육 역시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조합은 2015년부터 서울의 중ㆍ고교 경제금융동아리를 지도하고 있다. 생애 설계에 따른 인생계획 세우기부터 여의도 한국거래소나 재래시장 등 현장 견학까지 시니어 전문가의 실무 경험과 지식을 나누는 수업으로 만족도가 꽤 높다. 이씨는 “개인에게 알아서 하라기보다는 이제부터라도 연령대별로 준비해야 될 것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해야 한다”며 “더 나아가 제 역할을 좀더 확대해서 베이비부머 세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조합으로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이재헌(왼쪽부터)씨와 김정신씨가 2017년 서울 탑골공원에서 어르신을 상대로 재무상담을 하고 있다. 다우리이엔씨협동조합 제공
이재헌(왼쪽부터)씨와 김정신씨가 2017년 서울 탑골공원에서 어르신을 상대로 재무상담을 하고 있다. 다우리이엔씨협동조합 제공

 ◇공부하는 노년, 배움이 끝나면 삶도 끝난다 

“이제 그만 쉬면서 여가를 즐기지 무슨 일을 또 하려고 하느냐.” 조합 총무이사인 김정신씨는 주변 만류에도 계속해서 일을 찾아 나서고 있다. 조합에서 하는 사회공헌활동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보호관찰소와 지역아동센터를 다니면서 청소년들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보다도 휴가를 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더 바쁘다. 금융만 가르치고 말 게 아니라 청소년들의 마음까지 보듬고 싶어 올해 방송통신대 청소년교육과에도 입학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깨강정 같은 전통요리 만드는 법을 배우러 다니기도 한다. 지난해 지역아동센터에서 경제교육과 함께 푸드테라피 일종으로 닭강정을 만들어 함께 먹었더니 수업이 더 잘 풀렸던 기억 때문이다. 김씨는 “음식을 만들어서 같이 먹으니 진짜 ‘식구(食口)’가 되는 느낌이 들고, 아이들도 너무 좋아했다”며 “경제교육도 그렇게 하면 더 잘 먹힌다”며 웃었다.

이모티콘 사용법이나 청소년들이 쓰는 언어에 익숙해지려는 노력은 기본이다. 조합차원에서도 학생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보드게임으로 금융 용어나 직업을 알아보는 교재를 만들었다. 그 동안 축적된 소비, 저축, 투자 등 분야별 강의안을 모아 엮은 책자 ‘다우리의 경제금융길라잡이’는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전통요리를 잘 배워서 아이들과 같이 만들면서 금융수업을 하는 게 올해 목표예요. 방통대 2년을 잘 다녀 청소년들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건 내년 목표고요. 배움이 끝나면 삶도 끝난다는 말이 있잖아요. 필요할 때마다, 내가 모자라다 싶을 때마다 하나씩 계속 배워나가는 게 너무 재미있어요.” 그의 배움에는 끝이 없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