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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진 독립운동가’ 파리의 서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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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ㆍ저술활동으로 독립운동
일대기 ‘파리…’ 출간 이어
90년前 불어로 쓴 소설 번역
“그는 (중략) 지칠 줄 모르는 대단한 이상주의자, 평화 수호자, 반파시스트주의자, 그리고 섬세한 예술적 감각을 지닌 애국자였다.”(‘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
일제 강점기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 외교, 저술 활동으로 대한 독립의 정당성을 널리 알린 독립운동가 서영해(1902~?). 1956년 실종된 이후 60여 년간 역사에서 잊혀졌던 그 이름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과 프랑스에서 뒤늦게 호명됐다. 그의 일생을 다룬 최초의 전기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에 이어, 그가 쓴 한국인 최초의 프랑스어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이 번역돼 나왔다.
‘파리의 독립운동가…’는 한국과 프랑스에 남아 있는 각종 사료, 유족들의 증언을 종합해 독립운동에 헌신한 서영해의 발자취를 생생하게 추적한다. 그는 1902년 부산에서 큰 한의원을 하는 유복한 집안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3•1운동에 참여했다 수배자로 몰리자 이름을 희수에서 영해로 바꾸고, 상하이 임시정부 일을 잠시 돕다가 1920년 혈혈단신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후 파리에 언론사인 고려통신사(Agence Korea)를 설립해 27년 간 임시정부 파리 통신원, 주프랑스 대표위원을 지내며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사회 지지 여론을 끌어내려 애썼다. 그의 독립 무기는 총과 칼이 아닌 말과 글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미국에는 이승만이 있다면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다”고 뒤늦게 평가할 나올 정도로 활약이 컸다.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서영해의 삶은 뿌리 내리지 못했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한 이승만이 아닌 남북한 통일 정부를 지향한 김구를 따르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이후 중국으로 갔다는 짧고 모호한 기록을 끝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월북 설이 파다했지만, 북한에도 남아 있는 흔적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저자 정상천씨는 외교통상부 출신 국가균형발전위 과장이다. 2000년 파리로 국비 유학을 갔다가 서영해라는 이름과 우연히 만난 뒤 그의 비극적 삶에 매료됐다. 정씨는 18일 통화에서 “서영해는 남북한이 통일되는 완벽한 독립을 꿈꿨지만, 분단의 현실과 국내 정치 갈등 속에 남한과 북한 모두로부터 핍박 받으며 철저하게 잊혀진 비운의 독립운동가로 남았다”고 말했다.
서영해의 이름은 해외에서 더 크게 조명 받았다. 한국 역사와 풍습을 서술한 그의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은 1929년 프랑스에서 출간돼 인기를 끌었고, 유럽뿐 아니라 이집트 언론에까지 소개 될 정도로 반향이 컸다. 한국 독립을 넘어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 연대를 강조한 그의 외침이 공명한 덕분이었다. 소설은 주인공의 절규로 끝맺는다. “일본의 범죄행위들을 벌해야 하는 것은 바로 문명 사회 전체다! 억압하는 일본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바로 인류 전체다!”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프랑스를 비롯한 강대국들에 내쏘는 거침없는 일갈에 유럽인들은 매료됐다.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장석흥 국민대 교수는 ‘어느 한국인의 삶’ 해설에서 “자유·평화 사상에 바탕을 둔 서영해의 자취는 한국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 차원에서도 기억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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