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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중간 착취’라는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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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News)’가 새로운 것들이라는 정의는 기자의 정신과 역할에 제한을 가한다. 중요한 문제들은 대부분 새로울 게 없는, 오래된 문제인데 말이다. “뭐 새로운 게 있어?”라는 누군가의 지적에, 주삣주삣 꺼내놓았던 내 딴에 ‘중요한 문제’를 주섬주섬 다시 노트북의 오래된 폴더 안에 가둬놓는 일들을 기자 생활 동안 꽤 겪었다. 기자들도 약삭빠르게 적응한다. 새로울 것이 없는 오래된(그러나 중요한) 장애인 문제는 매년 ‘장애인의 날’에, 새로울 것 없는 젠더 문제는 ‘미투 1주년’에 신문지면이 더 너그럽게 포용해 준다는 것을 알고 그에 맞춰 기사를 내놓는다. 독자들조차 오래된 문제를 다룬 기사에는 그다지 주목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런 타협은 옳지 않다고 내 속의 무언가 속삭이고 있다. 오랜 문제들은 곪고 곪아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형태의 ‘새로운 사건’이 되어야만 언론이나 독자의 주목을 받곤 한다. 늘 있었던 문제인데, 마치 이제야 발견한 것처럼 새삼스럽게 떨어야 하는 그 호들갑이라도 그나마 다행스러울 때가 있다.
영남지역의 한 원자력발전소에서 일하는 방사선 관리 노동자가 보내준 ‘국민연금 가입 증명서’는 오래되고 중요한 문제 속으로 나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는 20년 전부터 ㈜금강코리아 직원이었다가 한일원자력㈜ 직원이었다가, 하나검사기술㈜ 직원이었다가, 선광티앤에스 직원이었다가…(중략)…지금은 하나원자력기술주식회사 직원이라고 나와 있다. 20년간 그 원자력발전소를 떠나본 적이 없는데, 소속 업체는 10번 가량 바뀌었다. 그는 한국수력원자력과 거래하는 용역업체 소속이며, 1~3년마다 진행되는 입찰에서 한수원이 어느 업체와 계약을 맺느냐에 따라 소속 업체가 바뀐다. 용역업체는 인건비에서 약 30%를 떼어간다. 새로울 게 없는, 용역ㆍ파견직이라는 수많은 비정규직들이 사는 모습이다.
2017년 정책사회부에 근무할 때, 후배들에게 취재를 시켜서 용역ㆍ파견 업체 문제점을 기사(“파견업체가 내 월급 16%에 4대 보험료까지 떼가요” “효율 강조하더니 용역업체 배만 불린 파견제”)로 내보낸 뒤, 포털에 줄줄이 달린 댓글들이 짠했다. “내가 정규직ㆍ비정규직ㆍ파견용역 다 해봤다, 파견은 21세기 노예제도고 원청과 용역회사 거머리 배부르게 하는 악마의 제도다” “여의도 XXX은행 경비용역비 1인당 3,300만원인데 용역업체에서 1,200만원 가량 떼감, 한 달에 한번도 안 오고 용역본사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름, 파견 아웃소싱 업체는 중간에서 취업자 피 빨아먹는 거머리 같은 존재다.” “이 나라는 구인업체와 인력파견ㆍ용역업체간 커넥션으로 노동자들 인건비 착취가 만연해 있지. 업체 입장에서는 갑질 하기 좋고, 쉽게 자를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용역업체들은 손쉽게 인건비 빼먹을 수 있어 좋고, 이래저래 노동자들 등골만 빼먹으려 드니…에휴.”
수십년간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는 상시직인데, 소속 용역업체만 바뀌는 이 ‘껍데기’는 무엇을 위함일까.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부가가치 생성도, 건전한 경쟁도, 혁신도, 능력주의도 아니며 노동유연화의 방식이라기엔 그 패악이 지나치다. 어디에서도 합목적성을 찾을 수 없는데, 1998년 파견법이 시행되고 20년이 흐르면서 ‘중간 착취’도 하나의 직업이 되어 버렸다. 방사선 관리 용역업체들이 “방사선 관리직이 한수원 정규직이 되면 용역업체 관리자 등 300여명이 일자리를 잃는다”고 반발하는 것이 그 맥락이다. 실제 정규직화가 진행되면 용역업체 관리자들은 실업자로 잡히고 고용지표에 악영향을 줄 것이다.
그래서 계속 이대로 가야 하나. 중간 착취 직종도 일자리 창출로 봐야 하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 같다. 다만 이런 생각을 해봤다. 기자를 포함해 나름 힘있는 직종을 파견ㆍ용역직으로 허용했다면 과연 이 정도로 조용하고, 무참하게 20년이 흘렀을까.
이진희 기획취재부 차장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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