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설정

세상에는 아령칙한 일들이 많지만 인생 수업은 그렇지 않다. 인생이라는 수레가 멈출 때까지 수업은 멈출 수 없다는 것. 얼마 전 나는 삼척에 있는 한 대안학교 졸업식에 초대받아 격려사를 하며 다시금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학교는 아주 작아 졸업생은 겨우 두 명, 그 졸업생들은 학력 인정이 되는 졸업장을 받는 대신 배움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 터득한 ‘존재의 선언’을 했다. 그것은 스승과 부모로부터의 주체적인 독립선언인 셈. 졸업생 중 한 학생의 존재의 선언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졸업이 어디 있겠어요. 또 다른 배움의 시작일 뿐이죠.”

내가 살아온 생을 돌이켜보아도 그렇다.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교육과정을 마친 뒤에도 내 인생수업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연애, 결혼, 자녀 낳아 기르기, 직장생활, 질병, 늙음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수업. 귀가 순해지는 나이가 되어 낡은 한옥에 들어와 살면서 나는 다시 대자연의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으니까.

지난해 여름날, 나는 분꽃 학교의 학생이었다. 마당엔 아내가 심은 분꽃들이 활짝 피어 큰 기쁨을 선사했는데, 어느 날 밤 비바람이 몰아치고 폭우가 쏟아졌다. 분꽃들은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아내는 쓰러지는 분꽃들을 보며 저걸 어째, 저걸 어째, 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자, 쓰러졌던 분꽃들은 그냥 쓰러진 채 다시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리고 명랑한 얼굴로 깔깔깔 웃는 듯 싶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꽃의 본성, 만물의 본성은 명랑이라고! 내가 분꽃 학교에서 배운 것.

또 어느 때는 제비학교 학생이었다. 지난해 우리 집을 찾아온 제비들은 두 번씩이나 처마 밑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깠다. 시골에서도 제비를 볼 수 있는 건 매우 드문 행운. 유기농을 하는 마을이라 먹이가 많아 그런지 해마다 제비들이 찾아온다. 나는 그렇게 찾아온 제비들을 귀인을 맞이하듯 환대한다. 제비 똥 치우는 일이 여간 번거롭지 않지만, 나는 제비가 집을 짓기 시작하면 그 밑에 판자를 달아 제비가 안정감을 갖고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돕고, 판자 옆으로 떨어지는 똥 치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또 제비가 알을 낳고 알을 품을 땐 일부러 발꿈치를 들고 걸어 놀라지 않게 하고, 알을 깨고 나온 새끼들이 재잘거리기 시작하면 새끼들이 먹을 먹이를 물어 나르는 어미를 짝짝짝 박수를 치며 응원하기도 한다.

그런데 새끼들이 다 자라 스스로 먹이를 사냥할 때가 되면 어느 날 갑자기 제비들은 종적을 감췄다. 그토록 애지중지했건만 이별의 표시도 없이 무정하게 사라지는 녀석들. 그러면 남는 건 처마 밑의 빈 둥지와 똥 자국과 허전한 마음.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둥지를 떠난 새는 둥지를 돌아보지 않는구나. 인간들은 얼마나 제 둥지에 집착하던가. 이런 교훈을 남기고 사라진 제비들을 비롯한 대자연의 동무들과 함께 하며 이루어지는 수업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죽음학의 선구자인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늘그막에 쓴 ‘인생수업’이란 책에서 “우리는 배움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갈파했다. 죽기까지 졸업은 없다는 것. 말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마비가 되어 남의 도움을 받아야 될 처지가 된 그는 새롭게 직면한 수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끊임없이 남에게 베푸는 일만 해 온 그가 막상 받는 처지가 되자 그것이 쉽지 않았던 것. “나는 도움을 받는 법, 감사하다고 말하는 법,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사랑받는 법을 배우기, 큰 병이 들어 죽음을 앞둔 그의 마지막 수업이었던 것. 우리라고 다를까. 우리 삶의 수업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생의 수레바퀴가 멈추는 날까지.

고진하 목사ㆍ시인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