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이어… 진료실도 폭력 무방비

입력
2019.01.01 17:25
수정
2019.01.01 22:29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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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 상담을 받던 환자가 의사에게 흉기를 휘둘러 숨지게 한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서 지난달 31일 경찰 과학수사대 대원들이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진료 상담을 받던 환자가 의사에게 흉기를 휘둘러 숨지게 한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서 지난달 31일 경찰 과학수사대 대원들이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우울증 치료와 자살 예방에 힘써온 임세원(47) 서울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외래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진 사건을 계기로 진료실 폭행을 차단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그동안 응급실에서 발생하는 주취폭력에 가려져 있었을 뿐, 진료실 역시 의사들에게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외래환자를 담당하는 의사들은 “진료실에서 환자가 작정하고 의사를 공격하면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권준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은 “2년 전 외래 진료실에서 환자가 갑자기 볼펜으로 얼굴을 가격해 봉변을 당한 적 있다”며 “안전요원이 있긴 하지만 진료실에서 벌어지는 폭행 사건에 일일이 대응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특히 하루에 외래환자가 많게는 1만명 이상 몰리는 대형병원에서는 환자들의 소지품을 일일이 점검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밀폐된 공간에서 진료가 이뤄지기 때문에 이번처럼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비상벨이 설치돼 있지만 무용지물이다. 한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폭력 사태는 순식간에 발생하기 때문에 벨을 누를 경황도 없고, 설사 벨을 누른다고 해도 안전요원이 진료실까지 도착하는데 시간이 걸려 의사 스스로 폭력을 저지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번 사건이 발생한 강북삼성병원 진료실에도 비상벨이 설치돼 있었고 실제 간호사가 벨을 눌렀지만 안전요원은 이미 사고가 발생한 뒤에야 현장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로 응급실에서 발생하던 병원 폭행이 사각지대인 진료실까지 확대되면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응급의료 종사자를 폭행해 다치게 하면 10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상 1억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응급실 폭행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해 시행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일반 진료실 폭행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은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의료 행위가 이뤄지는 장소’에서 폭행 발생 시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삭제하거나 주취자에 대한 심신미약 감경을 배제하는 등의 관련 법안은 환자단체의 반발로 논의가 중단된 상태다.

한편 이번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종로경찰서는 1일 강북삼성병원에서 담당의인 임 교수를 살해한 혐의로 박모(30)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박씨가 상담 도중 흉기를 꺼내 들자 임 교수가 복도로 피했고, 박씨는 뒤쫓아 나와 가슴 부위를 수 차례 찔렀다. 이후 박씨는 간호사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안전요원과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사건 현장에서 흉기를 바닥에 내려놓은 채 가만히 앉아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박씨가 범행 사실은 시인했지만,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횡설수설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치중 기자 cjkim@hankookilbo.com

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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