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 운동’이야말로 대한민국을 태동시킨 혁명

입력
2019.01.02 04:40
수정
2019.01.02 08:28
6면

 [특별기고] 한인섭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 

 일제로부터의 독립ㆍ황제 주권을 인민에게… 

 1948년 민주공화정의 출발점 

2019년 올해는 역사적, 정치적, 법적으로 각별한 해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와 국민과 헌법이 탄생한 지 한세기를 맞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3∙1운동 100년, 대한민국 100년, 임시정부 100년의 의미를 정리하면서, 다음 세기의 비전을 채워갈 시기입니다.

100주년이라면 떠들썩한 불꽃놀이와 기념행사가 떠오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가요. 3∙1절을 맞으면 그저 빨간 공휴일로 여기진 않는지요. 새해를 맞아 그 시대적 의미를 찬찬히 짚어보면 어떨까요.

 왜 3∙1혁명인가 

우리의 헌법 전문(前文)에서 출발해 볼까요. 우리 헌법은 1948년 제헌헌법 이래 1987년 현행 헌법까지 아홉 차례나 바뀌지만, 전문에서 “3∙1운동”이 빠진 적이 없습니다. 그럼 3∙1운동과 대한민국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1910년 대한제국이 마침내 망하고, 한국은 일본제국의 한 부분인 ‘식민지 조선’으로 편입됩니다. 실질 통치권은 조선총독부의 수중에 놓입니다. 헌병∙군사 강점 하에 놓인 국내에서는 국권회복운동을 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일본이 1차 대전의 승전국이 됨으로써, 그 지배력은 더 굳건해집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독립선언의 불꽃이 기적처럼 점화됩니다. 만주에서는 대한독립선언서가, 적의 심장부인 도쿄에서는 2∙8학생독립선언이 터져나옵니다. 해외와 국내 간의 긴밀한 연락에 이어 마침내 1919년 3월1일에 이르러 서울 한복판에서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대한독립만세의 물결이 전국으로 퍼져갑니다. 그해 3월부터 5월까지 한반도는 우리 역사상 가장 장대한 거국적 항쟁의 물결과 희생의 피바다를 이루게 됩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경성 종로에서 부녀자들끼리 길거리로 뛰쳐나와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19년 3.1운동 당시 경성 종로에서 부녀자들끼리 길거리로 뛰쳐나와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15년에 박은식 선생은 망명지인 중국 땅에서 ‘한국통사’를 써냈습니다. 망국에 이르게 되는 눈물의 아픈 역사이기에 ‘통사(痛史)’입니다. 그는 눈물 다음에는 피의 항쟁이 뒤따를 것이라 예견했습니다. 4년 뒤 그 피흘림의 투쟁사가 3∙1운동입니다. 해외에서 선생은 그 사실을 ‘조선독립운동지혈사’로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고난과 피흘림은 곧 광복사의 토대입니다. 3∙1운동에 대해 혈사(血史)는 이렇게 압축합니다.

“드디어 기미년 3월 1일, 우리의 태극기가 돌연히 하늘에 휘날리어 해와 달과 더불어 광채를 다투고, 독립 만세의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우리 남녀노소가 흘린 피가 길에 가득하였지만 용기는 더욱 충천하고, 기세는 한층 장렬하였다. 국내외의 보잘 것 없는 외딴 시골 구석에서도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만세를 외쳐 부르짖지 않음이 없었고 앞다투어 목숨을 바쳤다. 충정과 믿음을 갑주로 삼을 뿐, 손에는 한 치의 무기도 들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3∙1은 무엇보다도 독립선언일입니다. 미국의 독립선언일이 7월 4일이라면, 한국의 독립선언일은 3월1일입니다. 3∙1운동은 모든 한국인들이 두루 참여한 운동입니다. 시위자는 한국인 전체의 10분의 1 이상인 200만을 넘었습니다. 전국 각처, 남녀노소, 각계각층이 만세를 불렀고, 한국인이 있는 세계 곳곳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일제의 학살로 죽어간 한국인들이 2만여 명을 헤아리니, 부상자는 훨씬 많았을 것이고, 감옥살이한 사람이 5만 명을 넘습니다. 남녀, 지역, 계층, 연령, 종교의 차이를 허물고 동참한 점에서도 유례가 없습니다.

가끔 3∙1운동에 대한 적극적 평가에 약간 주저되는 뭔가가 있습니다. 왜 비폭력이고 만세운동이냐, 뭔가 나약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침략국을 물리치는 독립투쟁은 전면 무장투쟁의 형태를 띠기 마련입니다. 우리도 동학, 의병, 독립군, 의열단, 광복군 등의 무장투쟁을 전개합니다. 그러나 강점 후 일제는 우리 손에서 모든 무기를 빼앗았기에, 3∙1운동 당시에 우리 “민중의 손에는 촌철의 무기”도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비폭력의 만세운동을 개척해낸 것입니다. 특히 만세운동은 남녀노소가 다 참여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비폭력투쟁이 변혁의 동력임을 세계사적 모델로 실증해낸 게 우리의 3∙1입니다. 그야말로 ‘맨손 혁명’이었습니다.

[저작권 한국일보]3·1운동참여자와피해상황/ 강준구 기자/2019-01-01(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3·1운동참여자와피해상황/ 강준구 기자/2019-01-01(한국일보)

3∙1의 주역은 누구인가요. 물론 전체 국민들입니다. 알려진 주도자도 있습니다. 주요 선언서의 기초자(이광수, 최남선)나 33인 서명자 중에서 일제말 친일행적을 들어 개개인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뒷날의 변절을 들어 3∙1 당시의 순수함을 깎아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2∙8과 3∙1의 서명자들은 혹독한 고난을 각오했고, 투옥 중에 죽거나 불수의 몸이 된 분도 적지 않습니다. 독립선언서의 고색창연함을 탓하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기초자들은 근대적 문체혁명의 선두에 섰던 문필가들입니다. 3∙1 당일 태화관에 모인 지도자들이 종로경찰서에 자진포박당한 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논의도 있지만, 그 순교자적 감옥행은 이후 투쟁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1919년 시점에서 지도자와 대중들은 고결한 애국지사들로 존중되어 마땅합니다.

만세운동 한다고 독립될 리가 있겠냐는 반문도 합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한 점의 운동이 아니라 전반적 과정으로 파악되어야 합니다. 일제의 지배가 완비된 그 시점에서 폭발한 국민대항쟁을 통해 한국인은 절대로 일제의 일부일 수 없고, 독립을 희구하는 자주민임을 전세계에 알렸습니다. 이후 모든 독립운동은 그런 사실의 국제적 환기이기도 했습니다.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미∙영∙중이 “조선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독립시킨다”는 구절이 포함된 것도 피어린 독립운동의 결실입니다. 우리가 사할린, 오키나와, 대만 등과 같이 강대국의 일부로 편입되지 않고 독립국가로서 국제 위상을 확보한 것은 전체 독립운동의 성과입니다. 그 성과를 얻기 위해 만세운동, 임시정부, 의열투쟁, 광복군, 국내의 사회문화운동이 최선의 노력을 전개한 것입니다.

 왜 대한민국인가 

3∙1운동의 진짜 성과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의 수립입니다. 만세운동과 동시에 애국지사들은 새 나라를 끌어갈 주인을 3∙1운동에서 읽어냈습니다. 계층, 지역, 신분, 성별, 종교를 가릴 수 없는 전체 인민이 바로 그들입니다. 3∙1의 피흘림에 유관순으로 상징되는 여성들이 함께했기에 새 나라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남녀가 동등하게 참여하는 형태로 구체화됩니다. 새 나라의 체제는 전체 인민이 주권자가 되는 “민주제”이고, 황제나 왕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은 ‘공화제가 됩니다. 3∙1의 귀결점은 ‘민주공화제’의 수립이었습니다.

국호는 한마디로 그 나라입니다. 전체 인민의 나라는 ‘민국’입니다. 그 앞에 ‘대한’이란 지명을 붙여 ‘대한민국’이 됩니다. ‘대한제국’에서 ‘대한’은 이어받되, 나라 주인을 황제로부터 인민으로 바꾼 것입니다. 대한제국으로부터 대한민국으로!

각국에서 혁명이라 불리는 천지개벽 사태가 있습니다. 영국혁명, 미국혁명, 프랑스대혁명, 러시아혁명, 신해혁명, 터키혁명 등. 이들의 공통점은 왕정을 폐하고, 국민의 나라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인류사에서 가장 장구한 체제가 왕정이니, 가장 큰 정치변혁은 공화정으로의 전환입니다. 그것이 순순히 이뤄질 리는 없으니 혁명엔 거대한 유혈이 수반됩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인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격언은 실제 역사 그 자체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공화정 혁명이 있었나요. 우리 민주주의는 그저 미군정의 선물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민주공화정은 1948년 때 비로소 성립한 게 아닙니다. 1919년에 3∙1운동과 전 인민의 혁명적 진출을 통해 우리는 왕정을 뇌리에서 지워내고, 민주공화제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3∙1은 ‘운동’ 정도의 사건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입니다. 이를 구체화한 것이 1919년 4월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이고, 그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입니다. 그 이후엔 왕정회복의 주장은 사라졌습니다. 임시헌장 제1조는 100년간 헌법 제1조로서 굳건합니다. 3∙1이 갖는 유일무이한 성격은 다음의 ‘대한민국 건국대강’(1941)에서 잘 압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의 발인(發因)이며 신천지의 개벽이니…우리 민족이 3∙1헌전(憲典)을 발동한 원기(元氣)이며, 동년 4월 11일에 13도 대표로 조직된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임시정부와 임시헌장 10조를 만들어 반포하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이 자기 힘으로 이민족 전제를 전복하고, 5천년 군주정치의 낡은 껍질(舊殼)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여 사회의 계급을 소멸하는 제일보의 착수이었다. 우리는 대중의 핏방울(血滴)로 창조한 신국가 형식의 초석인 대한민국…”

이민족 전제와 군주정치의 동시타파! 그 원동력은 3∙1이었고, 3∙1 대중의 ‘핏방울’이었습니다. 이것이 ‘혁혁한 혁명’으로서의 ‘3∙1대혁명’의 요체입니다.

 왜 대한민국 임시정부인가 

이제 중국 상하이로 옮겨갑니다. 어떤 국가, 어떤 주권자, 어떤 헌법, 어떤 체제를 만들까 하는 고민을 안고, 1919년 4월 10일 밤 10시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조계 지역에 29인의 애국지사들이 모였습니다. 그날 밤샘 논의 끝에 국가, 국호, 체제, 정부, 헌법에 관한 획기적인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10개 조에 걸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그것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87년 9차 개헌으로 탄생한 헌법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규정함으로써 비로소 그 법통이 명문화했다. “임시정부”와 “법통”의 명문화에는 광복군 출신으로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 김준엽 선생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진은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을 제정한 안창호(앞줄 네번째) 등 임시의정원 인사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87년 9차 개헌으로 탄생한 헌법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규정함으로써 비로소 그 법통이 명문화했다. “임시정부”와 “법통”의 명문화에는 광복군 출신으로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 김준엽 선생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진은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을 제정한 안창호(앞줄 네번째) 등 임시의정원 인사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4월11일 오전에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탄생합니다. 일본에게 빼앗긴 국호 ‘대한’을 살려 나라를 되찾는다는 의미를 살리고, 인민이 주인으로 자기 모습을 드러냈으니 ‘민국’을 체제로 하여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사전 준비를 해온 이는 조소앙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했고,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창작했으며, 다수의 임정 헌법문서를 기초한 임정 헌법의 아버지입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도 대한민국 국호는 표결없이 통과됩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2천만 민족의 피로 물들여 명명한 국호”이고 이 국호로 “세계만방에 독립을 선포”한 것인데다, “30여년간 각 방면에서 사용”해온 “입에 익고 귀에 익은 국호”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임시헌장은 불과 10개 조이지만, 근대 민주국가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인민은 평등한 지위를 갖고, 자유를 향유하며, 참정권이 있습니다. 특히 남녀의 평등이 강조됩니다. 사형, 태형, 공창제를 전폐하여 인간존엄성을 보장하는 문화국가상도 뚜렷합니다.

다만 실효적 통치가 불가능했기에 정부형태는 ‘임시’로 합니다.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통치하는 방식으로 하여 의원내각제의 틀을 갖춥니다. 이 때를 ‘상해 임시정부’라고 흔히 부르는데, 타국의 지역명을 부착시킨다는 점에서 적절치 않습니다. 앞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정식 명칭으로 부르는게 좋겠습니다.

민국 수립의 과정에서 헌법상의 핵심 쟁점들이 정리됩니다. 국호(대한민국), 국체(민주제), 정체(공화정)도 그렇고, 남녀평등과 보통선거권도 그렇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몇차례에 걸친 헌법 개정을 통해 정부로서의 법통성을 이어갑니다. 해방된 지 3년 후 민국 30년(1948)에 이르러 “우리들 대한 국민”은 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열고, 제헌헌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수립합니다. 그때부터 ‘임시’가 아니라 ‘정식’정부인 것이지요. 다만 1948년의 정부도 100퍼센트 완전체로 보기엔 미흡합니다. 38선 이북 지역에서 투표가 불가능하여 300석 정원 중에 이북 의석 100석을 비운 채 출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헌법은 “평화적 통일의 사명”(전문)과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4조)할 것을 명기합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국가∙정부 수립은 1919년에 출범하였고, 1948년에 이를 재건하여, 이후에는 대한민국 체제의 틀 속에서, 점진적인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거대한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왜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인가 

1948년 제헌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임시정부’라는 표현은 명문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미군정은 임정의 정부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고, 임정 지도자들이 1948년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불참했다고 해서 단절성을 부각시키는 견해도 있지만, 긴 역사의 흐름에서는 역사적 연속성을 확인할만한 자료들이 훨씬 풍부합니다. 이후 헌법 개정에서는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라고 하여 더욱 모호하게 처리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마도 역사의식의 한계 때문이겠지요.

[저작권 한국일보]역대 헌법문서/ 강준구 기자/2019-01-01(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역대 헌법문서/ 강준구 기자/2019-01-01(한국일보)

그러다가 1987년 헌법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하여, “임시정부”와 “법통”이 명문화됩니다. 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은 김준엽 선생입니다. 한국현대사의 연구자이고, 탄압받는 학생들을 옹호한 민주총장으로 존경받는 그런 분입니다. 1986년에 그는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주장하는 기고와 학술대회를 주재합니다. 1987년의 개헌 국면에서 그는 정치 참여 권유를 거절하면서, 임정 법통 문구를 포함시킬 것을 호소합니다. 이 호소에 응답한 이는 이종찬 의원이었는데, 그는 1919년 대한민국 수립 현장에 참여했던 이회영 선생의 손자이자 혁혁한 독립운동 가문의 일원입니다. 이종찬 의원은 당시 개헌특위의 간사였던 현경대 의원에게 전달하여 관철시킵니다. 김준엽 선생은 이를 “광복 42년만의 감격적인 일”이고, “숙원”을 성취했다고 자축했습니다.

김준엽 선생은 왜 이렇게 기뻐했을까요. 그에게 임정 법통은 생애사와 직결됩니다. 청년시절 김준엽은 일본 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갔다가, 일본군을 탈출했습니다. 이어 장준하, 노능서 등 청년들이 일본 병영을 탈출합니다. 이들은 6,000리를 걸어 마침내 충칭에서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요인들을 만납니다. 노애국자들과 청년들은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청년들은 광복군의 일원이 되어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해방을 맞이합니다. 귀국 후 그는 장준하와 ‘사상계’ 잡지도 같이 하고, 1987년의 개헌 국면에서 임정법통론을 헌법에 새겨넣게 합니다. 그러니까 “임시정부의 법통”이란 문구 속에는 광복군 출신과 독립운동 가문의 비원(悲願)이 녹아들어 있는 것이지요. 이 임정 법통 구절에서 독립운동의 피눈물과 역사적 맥박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김준엽 선생은 “정신계승과 법통계승 사이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정신계승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법통계승이라 하면 명료하고 객관적입니다. 대한민국의 법적 계통을 따지자면, 3∙1운동으로부터 1987년에 이르는 역사적 맥락과 법적 계통이 정립됩니다.

그 의미의 차이는 2008년 이후 소위 건국절 논쟁에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1948년 건국절 주창자들에게 최대 장애물은 바로 헌법에 명기된 임정법통 구절이었습니다. 결국 온갖 주장과 물량공세에도 불구하고 건국절 주장은 헌법규정과 민족정기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춤해졌습니다.

 어떤 100년을 기념하는가 

우린 어떤 100주년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까요.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에 대한 질문입니다.

먼저 대한민국의 진짜 주권자로서 국민의 자부심을 재확인합니다. 왕조의 신민, 일제의 노예, 독재의 피치자가 아니라, 우리 국민은 민주독립국가를 이루어낸 민족사의 주인으로서 당당히 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인 노릇 할 수 있도록 헌신한 모든 선열들에 지극한 감사와 존경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그 희생을 치러내야 합니다. 그 분들의 생애와 정신을 섬세하게 살펴보는 게 다음 순서입니다.

지난 100년의 역사는 반외세 민족운동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민주혁명의 역사입니다. 3∙1은 외세를 타도하면서 왕조적 전제정치도 걷어내는 민주혁명 1단계를 표상합니다. 이어 4∙19와 부마와 5∙18과 6∙10은 독재와 군정에 맞서 싸워 민권 승리를 이루어낸 민주혁명 2단계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촛불 대연대와 같은 최근 흐름은 국민의 주인됨을 거듭 확인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중첩된 고난과 시련, 투쟁과 극복의 한세기를 거쳐가면서 단단해지고 깊어졌습니다.

3∙1과 4∙19와 6∙10과 촛불의 연속성 속에서 우리는 국민통합을 위한 귀중한 교훈을 발견합니다. 특히 3∙1혁명은 우리를 가르는 모든 벽을 녹여낸 민족 전체 대통합의 용광로였습니다. 각종 분열, 혐오, 장벽들에 시달리는 오늘의 현실에서 3∙1과 민국 탄생의 기억은 우리의 민주화와 인간존엄과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 대연대의 가치있는 역사입니다. 남북한이 함께 기념할 수 있는 날이 3∙1인 만큼, 평화통일의 과제를 자각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의 꿈은 무엇일까요.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함께 잘 사는 진정한 공화국입니다. 우리 헌법은 “평등∙자유의 공화적 복리를 담보하기 위한 약속”(이승만 제헌국회의장)이고요. 이 나라는 “국민 모두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헌법 전문) 보장해야 하는 체제입니다. 공공정책은 특권적 이익이 아니라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인간 존엄을 으뜸으로 보장하는 나라입니다. 그러한 보장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주권자인 국민의 상시 분발을 요청합니다.

각종 기념행사와 기념물도 필요합니다. 3∙1운동에 관한 역사적 상상력의 복원을 위하여, 그 운동이 일어난 날짜에 맞춰 지역별 릴레이 만세운동을 이어가는 것도 좋겠습니다. 에펠탑이 프랑스혁명 100주년에 세워졌듯이, 100년을 맞는 대한민국을 기념하는 상징물도 제대로 건립되어야 합니다. 전시회나 각종 교육을 통해 우리 역사를 제대로 느끼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기념행사를 특정집단에 편향되도록 하는 것은 3∙1의 본질에 맞지 않습니다. 기념식은 전국민의 축제로 승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3∙1절 행사는 만세삼창으로 마무리하곤 합니다. 2019년에 어울릴 만세삼창은 무엇일까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담아서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3∙1혁명 만세! 대한민국 만세! 평화통일 만세!

□한인섭 원장은

서울대 법대 교수. 저서로 ‘가인 김병로’ ‘인권변론 한 시대’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 ‘이 땅에 정의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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