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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국가 부도의 날

영화 ‘국가 부도의 날’ 스틸사진.

그 해 겨울, 날씨는 그렇게 춥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신종 인플루엔자에라도 걸린 양 덜덜 떨리고 아팠다. 나라가 망했기 때문이다.

1997년 11월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망한 기업은 물론이고 살아남은 기업마저 해고의 칼바람이 몰아쳤다. ‘명예퇴직’이란 용어가 생겼다. 기업들이 한꺼번에 직원의 절반을 내보냈다. 수많은 가장이 직장을 잃고 가족 전체가 위기에 몰렸다.

내가 속한 학과의 1998년 2월 졸업생은 약 20명, 이중 취업자는 2명에 불과했다. 2명 중 1명은 입사 대기 후 취소됐다. 나머지 1명이 들어간 대우그룹은 그때도 정신 못 차리고 분식회계와 빚으로 몸집을 불리다 2년 후 공중 분해됐다. 거의 모두 미취업 상태로 졸업하게 된 학생들이 교수들을 모시고 연 ‘IMF세대’의 사은회 분위기는 장례식장처럼 침통했다.

졸업 후 과외와 프리랜서 일로 용돈을 벌며 이곳 저곳에 이력서를 넣던 1998년 어느 날,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다. 모 신문사가 작은 잡지를 인수했다며 신입 기자를 2명 모집했는데 운 좋게 합격한 거였다. 들어가보니 이 잡지를 만드는 팀은 보수는 정규직과 같았지만 신분은 모두 계약직이었다. 언제든지 팀이 사라져도 문제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입사 후 얼마 안 돼 그 회사에서 한때 잘 나갔던 다른 사업부문을 통째로 포기하자 역시 ‘전원 계약직’이었던 직원들이 한순간에 잘려나갔다. 노동문제에 대해 타사보다 훨씬 관심을 갖고 있었던 언론사였지만 나라가 망했을 땐 제 코가 석자였다.

첫 월급은 69만원. 3개월 수습 후 받은 정상 월급도 100만원이 안 됐다. 하지만 그 와중에 ‘10년 구독 캠페인’에 참여를 강권해 매달 회사가 일부를 떼어 갔다. 그런데도 회사엔 ‘월급을 받지 않고 일하겠으니 써주기만 해 달라’는 구직자의 팩스가 연일 들어왔다.

부장은 갓김치처럼 맛깔나는 글을 썼다. 갓 들어온 우리 실력이 눈에 찰 리 없었다. 매일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나를 포함한 신입 2명을 괴롭혔다. 유명 영화배우와 함께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부장에게 머리채를 잡혀 뜯긴 적도 있다. 참다 못해 이직을 했지만 계속 부유하다 네 번째 직장인 이곳에 들어온 후에야 정착할 수 있었다.

내 경험은 IMF 시대의 극히 작은 일면일 뿐. IMF가 구제금융의 대가로 내린 가혹한 처방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과 가족이 고통을 겪었다.

다행히 그때는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국가 위기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은 아니었다. 우리 경제는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를 안게 됐다. 자본과 무역 양쪽에서 계속된 시장 개방을 통해 수출기업 위주로 경제가 발전했지만 이익은 국민 개개인이 아니라 극소수 수출 대기업에 축적됐다. 노동 유연화로 비정규직과 사내 하청, 파견근로가 급속하게 늘어났고, 결국 소수의 ‘안정적 직장인’과 다수의 ‘불안정 저소득층’이란 이중구조가 생겼다. 정년이 되기 훨씬 전 대부분 명예퇴직, 희망퇴직 당하는 관행으로 자영업은 포화상태가 됐다. 한국 사람들은 IMF 이후 ‘경기가 좋다’는 얘기를 해 본 기억이 없다.

경제적 불평등은 국론분열도 가져왔다. 내편이 하는 일은 무조건 감싸고 다른 편이 하는 일은 무조건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풍조가 생겼다. 논조를 위해 사실마저 왜곡하는 일부 언론, ‘내편’ 콘텐츠만 보여주는 뉴미디어는 이 같은 ‘외눈박이’를 양산하고 있다.

외환보유액이 무려 4,000억달러에 이르는 지금, 1997년 외환위기와 같은 이유로 또다른 ‘국가 부도의 날’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현재 한국이 당면한 문제 역시 그만큼 심각하다. 미래가 안 보이는 탓에, 모든 경제주체가 불안해 하고 절망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외눈이 아니라 두 눈으로, 행위자보다는 행위를 보고, 현상보다는 원인을 탐구하고, 남탓만 하지 말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지혜가 정부와 정치권은 물론이요, 국민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우린 식민지와 전쟁과 국가 부도를 모두 극복한 저력 있는 국민이니까.

최진주 기자 parisc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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