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톺아보기] ‘사겨보다’와 ‘줴박다’

입력
2018.12.14 04:40
29면

“외국어 잘하고 싶으면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사겨)보는 게 좋아요.” 이 문장에서 괄호 안에 들어갈 말은? ‘사귀어’가 맞다. 줄임말로 쓰면 ‘사겨’도 맞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겨’로 줄어들 수 있는 말은 ‘사귀어’가 아니라 ‘사기어’다. ‘사기다’는 ‘사귀다’의 방언이니, ‘사겨’는 규범에 맞지 않는 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귀어’를 어떻게 줄여 말해야 할까? 아쉽지만 줄여 말할 방법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줄여 쓸 방법이 없다. ‘위+어’를 한 음절로 줄여 말할 때의 발음을 표기할 자모가 없기 때문이다. 한글맞춤법에서 허용하는 모음자 21개 중 줄어든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는 ‘ㅑ, ㅕ, ㅛ, ㅠ, ㅒ, ㅖ, ㅘ, ㅙ, ㅝ, ㅞ, ㅢ’다. 이 중에 ‘사귀어’를 줄인 말을 표기할 문자는 없다. 줄여 쓸 문자가 없으니 줄여 말하는 걸 인정할 근거도 없다. 규범에 따른다면 ‘사귀어’나 ‘바뀌어’ 등은 줄여 말하지도 줄여 쓰지도 말아야 한다. 이런 모순된 상황 속에서 ‘사겨’나 ‘바껴’처럼 일부 방언에서 쓰이는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네’와 ‘내’의 발음을 구분하기 어려워지자, 표준어 ‘네가’를 대신하여 방언 ‘니가’가 널리 퍼진 것처럼.

결국 현실과 규범의 괴리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두 가지다. ‘위+어’의 발음 [wjə]에 해당하는 모음자를 새로 도입하든지, 일반화된 방언 발음을 인정하든지.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런 환경에서 관습화된 줄임말이 사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선 ‘줴박다’나 ‘줴짜다’를 ‘쥐어박다’와 ‘쥐어짜다’의 준말로 설명했다. 이처럼 관습을 존중하는 태도라면 ‘사귀어보다’와 ‘사겨보다’를 함께 인정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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