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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이 역사 속으로 퇴장할 날이 꼭 20일 남아있는 이 때, 올 한 해 국제뉴스 속에서 접했던 부고(訃告)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누구 것이었을까를 생각한다.

생전의 업적, 명예, 권력으로 따진다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3월 14일)이나 코피 아난(8월 18일) 전 유엔 사무총장, 혹은 조지 H.W. 부시(11월 30일) 전 미국 대통령 같은 이들이 앞자리를 다툴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현실에 미친 영향력으로 따진다면 자국 영사관에서 살해당한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10월 2일)를 꼽는 게 온당하지 않을까. 그건 그의 죽음이 단지 엽기적이거나 비극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죽음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보자. 중동 최대의 산유국인 사우디를 새로운 미래로 이끌어갈 것이라고 칭송 받던 30대 리더의 실체는 잔혹한 권력자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오랫동안 사우디가 이 지역에서 행사하던 리더십은 사상누각이라는 사실도 증명됐다. 세계 주요 언론들은 카슈끄지의 죽음 이후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산유국들의 모임인 걸프협력회의(GCC) 국가들의 결속력이 눈에 띄게 와해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사우디에 힘을 실어주면서 전임자가 구상했던 중동질서를 재편하려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졌다. 그는 카슈끄지 죽음의 진상이 한 꺼풀씩 드러날 때마다 갈팡질팡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계는 잠시 경악하는 시늉을 했을 뿐 카슈끄지의 ‘핏값’을 제대로 받아내자는 결기를 보이지 못했다. 국제질서가 원칙이 아닌 힘에 좌우되고 민주주의나 인권 같은 가치는 국익 앞에 헌신짝처럼 버려진다는 사실만 다시 확인된 셈이다. 얼마 전 세계 주요 국가 정상이 모인 자리에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파안대소하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사진이 살풍경했던 건, 그리고 미국의 중동정책을 좌지우지하는 대통령의 사위가 카슈끄지의 죽음 이후에도 무함마드 왕세자에게 사적으로 연락해 ‘폭풍’을 헤쳐나가는 법을 조언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냉소적이 됐던 건 그런 이유에서다.

돌아가는 사정을 볼 때, 카슈끄지 살해사건의 전모가 파헤쳐지고, 책임자가 처벌을 받을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카슈끄지의 유족이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조치로 요구하고 있는 시신 인도조차 난망해 보인다. 유쾌하지 않은 뉴스 속에서 그나마 위안 삼을 만한 일은 무함마드 왕세자에 대한 미국 의회의 높아진 비판 여론이 아닐까 싶다. 미 상원은 이전에 부결시켰던 예멘 내전 종식결의안(사우디 지원 중단 결의안)을 지난달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결의안이 하원까지 통과할지는 불확실하지만, 수니파 종주국으로서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예멘 내전에 개입, 모험적 군사행동을 주도하고 있는 무함마드 왕세자에게는 적지 않은 압력이 될 걸로 보인다.

때마침 지난주 스웨덴에서는 예멘 내전의 당사자인 예멘 정부군 측과 후티 반군 측이 2년 만에 평화협상을 재개했다. 항구와 공항이 막히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아수라장 속에서 하루 700만 명의 어린이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예멘 내전은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인도주의적 재난이다. 꼬이고 꼬인 내전의 원인을 따져볼 때, 내전이 장기화한 이유를, 정부군 배후에 있는 무함마드 왕세자의 영웅주의로만 꼬집어 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 난국을 풀어낼 수 있는 영향력을 적지 않게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국제사회가 예멘 내전에서 손을 떼도록 사우디에 압력을 가하는 일은, 비명 횡사한 카슈끄지의 피를 그나마 헛되지 않게 하는 양심의 리트머스 시험지 아닐까.

이왕구 국제부 차장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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